사랑 그리움 725

아버지의 마음 / 김현승

아버지의 마음 / 김현승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아버지의 동포(同胞)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英雄)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것들이 간직한 깨끗한 피로..

사랑 그리움 2021.05.09

몰라 / 임은숙

몰라 / 임은숙 ​ ​ ​ 언젠가는 너의 깊은 눈망울과 그 눈빛에 담긴 진실을 떠올리며 어쩌면 이 순간의 감정 역시 일종의 사랑이었음에 눈시울을 붉힐지도 몰라 바람 부는 들판을 홀로 걸으며 네가 내게 했던 말들과 그 말 속에 감춰진 서운함을 떠올리며 단 한 번도 따뜻하게 안아주지 못한 죄책감에 한참을 흐느낄지도 몰라 ​ 나의 슬픔 모두 너의 것이었음을 나의 등은 항상 너를 향해 있었음을 ​ 세월이 남기고 간 너의 긴 그림자 한겨울의 텅 빈 거리를 서성이는데 정작 곁에 없는 너로 하여 멀어져간 기억에 울어버릴지도 몰라 ​ 오늘이 옛날로 되는 어느 날엔가 쓸쓸히 너의 이름 부를지도 몰라

사랑 그리움 2021.04.11

해질녘에 아픈 사람 / 신현림

해질녘에 아픈 사람 / 신현림 이제 떠나야 할 것 같네요 그대 해안가를 떠도는 것만으로 즐거웠어요 그대 외투 빛깔처럼 황토빛 바다를 보는 것만으로 그 바다에 내 얼굴 파묻고 웃고 운 것만으로 그대도 날 그리워할까요 언젠가 그대 향기 잊혀지겠죠 향수병에 담아두지 못했는데 그대 손 한번 잡지도 못했는데 그대 갈망, 슬픔도 껴안지 못했는데 그대가 믿는 모든 게 되고 싶었는데 먹고살기 참 힘들죠 밤새 일하느라 거친 손등 호박잎이구 거긴 밥만큼 따뜻한 얼굴이구 아아, 그새 정들었나 봐요 훌훌 떠나려네요 멀리 꽃나무가 흔들리네요 속절없이 바다가 나를 덮어가네요

사랑 그리움 2021.04.11

빈자리 / 임은숙

빈자리 / 임은숙 둘이어서 덜 외로운 건 아니다 홀로일 때보다 둘이어서 흘린 눈물이 더 많았음을 너와의 소통은 나의 요원한 바램이었고 둘 사이를 가로지른 침묵은 평온을 가장한 毒이었지 더 이상 너로 하여 뛰지 않는 나의 심장과 배신의 길모퉁이에 조그맣게 남아있는 미련 혼자라는 사실보다 둘이일 때의 빈자리가 외로움을 부르는 법이다

사랑 그리움 2021.01.03

가을의 노래 / 임은숙

가을은 허무한 탄식으로 시작된다 도망치 듯 스쳐간 봄과 여름이 그 흔적마저 말끔히 지우려고 여기저기 굵직한 붓질을 한다 단풍처럼 눈시울을 붉혀도 괜찮은 계절 가을엔 누군들 슬프지 아니하리 꽃이 진 자리마다 깊어가는 상처 아픔이어라 슬픔이어라 떨어지는 낙엽 한 장 지금은 침묵을 필요로 하는 시간 하고 싶은 말은 가슴 깊이 접어두라 한다

사랑 그리움 2020.10.19

마음의 길 / 김재진

* 마음의 길 / 김재진 마음에도 길이 있어 아득하게 멀거나 좁을 대로 좁아져 숨가쁜 모양이다. 그 길 끊어진 자리에 절벽 있어 가다가 뛰어내리고 싶을 때 있는 모양이다. 마음에도 문이 있어 열리거나 닫히거나 더러는 비틀릴 때 있는 모양이다. 마음에도 항아리 있어 그 안에 누군가를 담아두고 오래오래 익혀 먹고 싶은 모양이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가 달그락달그락 설거지하고 있는 저녁 일어서지 못한 몸이 따라 문밖을 나서는데 마음에도 길이 있어 갈 수 없는 곳과, 가고는 오지 않는 곳으로 나뉘는 모양이다.

사랑 그리움 2020.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