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예수

불쌍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다 / 김요한목사

대구해송 2023. 6. 15. 21:39

불쌍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다 / 김요한목사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15:19)

 

고 이중표 목사님이 자신은 별세목회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주일마다 성도들을 이끌고 십자가를 올라간다고 언급을 한 기억이 납니다.

막연한 말이긴 했지만 내 영이 그 분의 말씀에 동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그 교회에서 별세가 어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몹시 궁금합니다.

이 목사님은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 살면서 이생뿐이 아니라

내세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보고 끊임없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오르셨을 겁니다.

현재 기독교는 기독교라는 말 그대로 예수에게서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는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마음의 수건이 벗겨져서 성경이 보이고 주의 영이 계시므로

자유를 얻어 하늘 보좌에 앉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본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고후3:17-18)

찬송은 귀하신 주여 날 붙드사 주께로 날마다 더 가까이

저 하늘나라 나 올라가 구주의 품 안에 늘 안기어...하고 부르면서

왜 주의 형상으로 화하여 그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는 건 믿지 못할까요?

설마 죽어서 천국에 가서 주의 품에 안기려는 뜻으로 부르는 찬송은 아니겠지요?

 

지금 한국에서 나름대로 대형교회라고 목사들의

설교를 들어 보면서 이 사람들이 참 불쌍하다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도저히 끝까지 들을 수가 없어서 시작하자마자 그만 끄고 맙니다.

그건 예수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지는 성령 이전의 제자들의 수준들이기 때문입니다.

왜 주의 영이 역사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생명을 먹고 마시는 새 언약을 모를까?

진리 안에 자유를 얻어 심령에 뿌려진 하나님의 씨(요일3:9)이신 그리스도가

형체화 되어가는 구원을 보이고 그 구원을 설명하지 못할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죠.

우리가 잘 아는 이사야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6:8) 하고 나가서 한 말이

‘너희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사6:9)입니다.

온 세상을 향하여 열방을 향하여 다 예수 믿으라고 외친 것이 아닙니다.

다만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가 남아 있듯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라고 전파했습니다(사6:13)

주님께서 좋은 땅에 뿌려진 천국의 씨를 말씀하시면서 그대로 인용하셨습니다.

 

좋은 땅은 자연산 인간의 마음 밭이 아닙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곳은 세군데 뿐입니다.

에덴동산과 가나안 그리고 새 언약이 선포된 지금은 그리스도 안입니다.

그리스도 밖은 어둠이며 마귀의 세계이며 사망의 그늘입니다.

거기서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긴 보아도 알지 못합니다(마13:14)

아니 오히려 완악한 백성들이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고침을 받을까 주님께서 두려워하십니다(마13:15)

그래서 주님께서 비유로 그 비밀을 밀봉하시고 진리를 아는 제자들만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하고 말씀하십니다(마13:16)

바울은 어찌하여 부활과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아담 안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서 영원한 생명의 씨앗이 된 사실을 믿지 못하는가 탄식합니다.

우리는 통상 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복이 온다고 말합니다.

말씀의 씨가 그 속에 심겨지지 않았는데 어찌 형체인 몸이 변할 수가 있겠습니까?

 

부활과 생명과 하나님의 형상과 그 영광을 함유한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심겨져서 그 씨가 형체로 드러나므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로 드러납니다.

바울이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바라는 것이 이 세상뿐이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다고

말한 것은 우리에게는 죽은 다음에 천국이 있다 이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심겨진 하나님의 씨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몸에 형체로

나타나서 그 영광을 드러내는 영광의 찬송으로 되어가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겁니다.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고 자랑한 이유도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는 신비한 신진대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배워서 따라가는 자들 속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고전15:43-44)

그리스도 안에 다시 살아난 자들에게 그리스도는 생명주시는 영으로 역사하십니다(고전15:45)

곧 부활과 생명의 영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내주역사하시는 영광스러운 복입니다.

우리는 흙에 속한 형상에 분칠을 하고 질병으로 빌빌대다 죽을 불쌍한 존재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부활의 능력과 생명의 풍성함으로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고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스러운 자유를 보이며 살다가 마지막 나팔에

눈 깜빡하는 순식간에 홀연히 변하여(고전15:51)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존재들로 부름을 받아 그 씨를 품고 형체의 변화를 위해

바울과 같이 그 소망을 바라보며 자랑스럽게 그 십자가를 지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