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왜 안흥은 찐빵으로 유명해졌을까

대구해송 2023. 6. 16. 23:36

횡성 동부에 자리한 안흥면은 우리에겐 찐빵으로 익숙한 동네다. 허나 예나 지금이나 조용한 이 동네가 왜 찐빵으로 유명해지게 된 것일까? 1960년대 초 안흥은 사방에서 모여드는 인파로 북적이는 교통과 물류의 요충지였다. 강릉으로 향하는 길목으로 오일장이 열릴 때마다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로 붐볐다.

당시 한국전쟁의 참화가 아직 가시기 전이라 배를 굶주리는 사람이 많았기에 막걸리를 파는 판잣집에서는 술을 넣어 반죽해 먹던 찐빵을 만들어 팔았다. 5원짜리 찐빵하나에 시래깃국을 함께 주었고, 이것은 배고픈 길손들에게 한 끼 따뜻한 식사가 되었다.     

1971년 서울, 강릉을 오가는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된 이후, 강원도 고랭지 채소를 운반하는 사람들과 이곳을 오가는 사람들이 중간에 안흥을 들려 즐겨 먹는 간식으로 자리 잡았지만 이곳이 지금의 명성을 얻게 된 것은 1990년대 중반이다.

면사무소 앞에 파는 조그마한 찐빵집의 맛을 본 기자의 언론보도를 시작으로 방송출연이 잦아지면서 어느덧 전국적으로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룬 이후 기성세대가 예전 추억의 맛을 되새기는데 안흥찐빵이 딱 알맞았기 때문이다.     

이제 안흥일대는 찐빵을 파는 가게들이 하나, 둘 늘어나게 되었고, 오늘날 안흥찐빵 마을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안흥을 가로질러 흘러가는 주천강은 말 그대로 술샘이라는 의미로 옛날부터 술을 빚기 좋은 적당한 습기를 제공했으며 각종 발효음식 및 찐빵을 숙성시키기 좋은 조건이었다.

찐빵의 맛이 다른 찐빵처럼 달진 않지만 팥자체에서 풍기는 담백한 맛과 반죽의 쫄깃함이 다른 지역의 찐빵과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맛을 자랑하는 것이 안흥찐빵의 매력일지도 모른다.     

안흥찐빵이 처음 시작되었다고 전해지는 <면사무소 앞안흥찐빵>이 가장 유명한 집이고, 이곳을 중심으로 찐빵과 관련된 조형물이 들어서 있다. 근래에 안흥찐빵을 테마로 하는 안흥찐빵모락모락이라는 테마파크가 들어서 있지만 아이들이 흥미로워하는 몇 개의 체험만 진행되고 있을 뿐 전시시설과 다른 볼거리는 보완이 필요하다.

산골에 위치한 안흥을 찐빵만 먹고 가기에는 조금 아쉽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산골로 더 깊숙이 들어간다면 강원도를 대표하는 명산, 치악산 자락으로 이어진다.

원주와 마찬가지로 횡성 역시 치악산 자락이 이어지는데 이곳에는 태종 이방원과 그의 스승 운곡 원천석과 관련 있는 유적이 더러 분포하고 있다. 원주 원씨의 중시조이며, 공민왕 당시 과거에 급제했지만 고려말의 정치가 혼란스러워 치악산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은거하게 되었다. 하지만 수많은 제자를 기르며 유학 발전에 힘쓰기도 했다. 

그중 하나가 후에 왕이 되는 태종 이방원이었다. 태종이 즉위한 후 원천석을 기용하려고 불렀으나 그는 응하지 않고 치악산 깊은 골짜기로 숨어버렸다. 태종은 직접 치악산 자락으로 와서 바위에 올라 집 지키는 할머니를 불러 선물을 하사한 후 돌아갔으며 그의 아들을 풍기현감으로 임명했다고 전한다.      

태종이 있었다는 바위는 주필대라고 불러오다가 후대에 태종대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비각을 새로 만들어 주필대라 새겨진 비석을 보호하고 있고, 후대에 널리 이 이야기가 전해지게 된 것이다. 부산의 태종대와 조금 헷갈릴 수 있지만 그 태종은 신라의 태종 무열왕과 관련된 곳이다.

근처에는 운곡과 관련된 노구소, 황지암이 있으며, 치악산에는 운곡이 은거하던 곳이라 전하는 변암과 누졸재터가 있지만 가는 길이 멀어 일일이 가긴 힘들었다. 후에 태종이 상왕이 된 후 다시 그를 부르자 어쩔 수 없이 입궐했지만 상을 치르는 것처럼 흰옷을 입어서 골육상쟁을 벌였던 태종에 대해 항의하는 뜻을 나타냈다.     

태종대의 초입으로 향하면 강림면에 자리한 강림교회를 만날 수 있다. 그 앞에 자리한 옛 강림우체국 구석에는 각림사터를 알리는 표시석이 하나 서 있다. 글자도 마모되어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지만 이방원과 큰 인연을 지닌 장소라는 사실 하나는 또렷이 알 수 있었다.

1380년 13살의 소년 이방원은 아버지와 함께 이곳으로 온 이후 원천석 선생을 스승으로 삼아 이곳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 효과가 영험했던 탓인지 5년 후 과거에 응시하여 병과 7등의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했다.

그의 형인 이방우나 이방과도 관직생활을 하긴 했지만 음서를 통해 진출한 것이라 그 성과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마 각림사에서의 수험생활이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이방원은 평생 이곳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곳 횡성에 대한 이방원에 대한 관심은 왕이 되고 나서도 지속되었다. 국왕의 친림하에 진행되는 군사훈련을 강무라 하는데 이곳 횡성에서의 강무와 관련된 기록만 6차례나 된다. 1419년 횡성에서 진행된 강무는 군마 1만여필이 동원되어 실제 전쟁과 같았다고 전해진다.

국왕의 지방행차가 쉽지 않았던 만큼 아버지 묘소의 방문을 명분으로 수 차례 수원을 오고 갔던 정조의 마음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각림사는 태종이 수 차례 재물을 하사할 정도로 그 애정이 깃든 사찰이었지만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폐사되고 만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변계량이 지은 시만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