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안개도 名山을 지우지 못했다

대구해송 2023. 6. 16. 23:38

경남 거창은 산들의 고향이다. 백두대간과 가야기맥, 진양기맥, 양각지맥 등의 수많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분지에 터를 닦고 있다. 군내에 걸친 산만 해도 50여 개에 이른다. 또한 덕유산, 가야산, 지리산이 그 외곽에서 에워싼다. 이 숱한 산들 가운데 웬만한 산은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보해산(911.5m) 역시 잘 알려지지 않은 산이다. 하지만 최근 이웃한 금귀봉과 더불어 거창의 숨은 명산으로 각광받고 있다. 수려한 암릉 위로 일망무제의 시원한 절경이 펼쳐지는 산이다.

보해산 이름은 산 인근에 있었던 보해사라는 절에서 유래한다. 이 산 서쪽 절골과 그 앞 해인터에 보해사가 여러 암자를 거느리고 있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보해사·보광사 모두 수도산에 있다"고 전한다. 수도산은 보해산 바로 북쪽에 접한 산이다.

거창의 숨은 명산 들머리, 거기마을

지난 5월 4일 보해산으로 향했다. 하필이면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이날 하루에만 제주도 서귀포시에 무려 300mm의 폭우가 쏟아졌고, 사흘간 한라산엔 무려 1,000mm의 비가 내렸다. 1961년 기상관측 이래 가장 많은 비가 내린 날이다. 이 비구름은 점차 북상하면서 전국을 뒤덮어갔다.

기상청 비 소식은 전날 예보와 달리 오후 2시에서 오후 7시로 점차 늦춰져 하산 때만 비 맞을 각오를 했다. 하지만 승용차가 백두대간 덕유산 신풍령을 넘어설 무렵 산 정상부에 먹구름이 뒤덮더니 12시쯤부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섣부른 믿음에 된통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거창의 산들은 전부 산중턱까지 안개구름이 끼어 있다.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한참을 내려서니 비가 뚝 그쳤다.

보해산 835봉 아래 자리한 일구암과 일구불당. 작은 불상과 마찬가지로 바위 아래서 비바람을 피한다. 어느 은둔한 도승이 이곳에서 도를 닦을까."보해산 들머리가 어디인가요?"

"어디긴요, 거기죠."

"장난하지 말고요?"

"거기, 고대할 만한 마을이죠."

날씨가 맑아지자 지명을 농담 삼을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 거창군 주상면 거기마을 거기삼거리에 도착해 차에서 내렸다. 보해산과 금귀봉 원점회귀 산행은 이곳을 기점으로 거의 이뤄진다. 주차를 하고 고대마을로 향했다.

밀면 곧 넘어질 듯한 조각난 접시바위. 바닥에는 2개의 바위 조각이 흩어져 있다.보해산 서쪽에 자리한 거기리는 거기, 외장포, 내장포, 고대 4개 마을로 이뤄졌다. 거기(걸터)마을은 옛날에 돌이 많아 '돌밭'이라 불리다, 개울이 마을을 끼고 흐른다 하여 '걸터'라고 불렸는데 한자 표기를 하면서 거기가 됐다.

 

장포는 장승이 있었다 하여 '장성불', 임진왜란 때 터를 잡은 유성근이 103세를 살고 그 아들도 93세를 장수했다 하여 장생동長生洞이라 불린 데서 유래한다. 고대는 500년 전 고대라는 사람이 마을을 열었다고 한다. 오래된 터라 고대, 느티나무가 있었다 하여 괴대라고도 불렸다.

해발 360m 지대에 자리한 고대마을에 들어서자 날씨가 또다시 급변했다. 안개구름이 침봉을 이룬 835봉과 보해산 산허리를 점차 뒤덮어갔다.

"산이 뿌옇고 흐리네요. 가랑비가 내리는데요."

"현재 기상 예보는 오후 7시부터 비 소식이니, 큰 비가 쏟아질 것 같지는 않네요."

절벽 끝에 자리한 천혜의 암자, 일구암

고대마을 오른쪽 능선길은 소나무가 울창한 숲길이다. 능선길에 접어들자 이내 비가 그치고 햇살을 머금은 연녹색의 작은 잎들이 숲을 환하고 맑게 비쳐 수채화 같은 신비감을 더해줬다. 등산로는 인적이 드문 곳이라 간혹 잡목이 우거지거나 옻나무가 손에 잡히기도 해서 놀라기도 했지만 대체로 쾌적했다.

길은 한 차례 급격하게 가팔라진 후 주능선 귀이터재에 닿았다. 보해산과 금귀봉 중간쯤에 해당하는 귀이터재에서 835봉으로 향하는 능선길 또한 이전과 별반 차이 없는 울창한 송림이다. 고대마을 갈림길에 도착할 무렵 모처럼 조망이 트이는 운치 있는 쉼터가 나왔다. 10m쯤 될법한 쓰러진 나무를 이용한 벤치에 앉아 쉬는데 갑자기 짙은 산안개구름이 해일처럼 몰려왔다.

"저게 비구름인가요? 안개구름인가요? 살기등등하네요."

"비 쏟아지기 전에 얼른 암릉을 넘어서야겠는데요."

암릉 우중산행 할 생각을 하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게다가 송림을 이룬 수려한 능선길에는 기암괴석들이 연이어 나타났다. 제일 먼저 길 한가운데 박힌 조각난 접시바위가 발길을 잡아챘다. 숲속 안쪽에는 거대한 바위를 쪼개며 자란 소나무가 만고상청의 기상으로 서 있고, 그 앞엔 또 한 그루의 소나무가 금방이라도 굴러 떨어질 것 같은 집채만 한 바위를 받치고 있다. 또한 너른 반석이 튀어나와 쉼터를 제공해 줬다. 심심찮게 보이는 기암괴석에 도무지 발걸음을 재촉할 수 없었다.

835봉을 오르기 직전에는 거대한 바위가 눈앞에 떡 하니 나타났다. 바위 밑에 줄줄이 매달린 예쁜 연등을 따라 밧줄을 잡고 올라서니 절벽 아래 일구암이 있다. 바위틈에 자리잡은 일구불당에는 작은 불상이 들어서 있고, 그 앞에는 불전함이 놓여 있다.

 

또한 절벽의 소나무에는 "누구든 소원성취 빌어보세요. 여기는 전설이 있는 곳입니다"라고 쓰인 푯말도 붙어 있다. 어느 은둔한 도승이 도를 닦는 곳일까. 그때 마침 나무에 매달린 풍경이 갑자기 요란하게 울리더니 몸이 휘청할 정도의 폭풍우가 몰아쳤다.

짙은 안개구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불당 앞 절벽 너머는 섬뜩하게 다가왔고, 순식간에 쏟아진 비바람은 온몸의 체온을 빼앗아 갔다. 일구암을 내려서자 바람은 금세 잠잠해지고 언제 왔냐는 듯이 비가 그치고 안개구름만 산을 휘저었다.

"실제 비가 오는 게 아니네요. 안개구름이 휩쓸고 가며 적신 나뭇잎을 세찬 바람이 불면서 폭풍우로 변한 거죠."

일구암의 지붕격인 거대바위에 지그재그로 설치된 난간 나무계단을 가쁜 숨을 헐떡이며 올라서니 835봉 암릉길이다.

"여기 준.희 이름이 붙은 '양각지맥' 푯말이 있네요."

"보해산은 백두대간 초점산에서 분기해 시코봉에 이른 후 양각산~흰대미산~보해산~금귀봉~박유산~합천호에 이르는 양각지맥의 산입니다."

장가계를 보는 듯한 보해산 천애협곡

835봉에서 시작된 암릉길은 육중한 바위들이 서로 겹치고 껴안으며 동면으로 깎아지른 천길 낭떠러지를 만들었다. 산이 구름에 덮여 기대했던 일망무제의 조망은 포기한 지 오래지만 아쉬움이 남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온갖 기암괴석이 허전함을 대신 채워줬다. Z자로 쪼개진 절벽 끝에 자리한 번개바위와 독사바위를 비롯해서 기암과 괴석이 꼬리를 물며 이어졌다. 또한 모진 비바람에도 가지가 휘휘 늘어지고 뻗어나간 낙락장송이 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암릉 사방이 온통 화이트아웃으로 변했다. 오로지 한치 앞의 암릉만이 마치 백지 위에 바위만 그린 듯한 풍경으로 다가왔다. 바람이 불 때마다 암릉에 비가 내려쳤고, 절벽 끝에서는 폭풍우가 쉴 새 없이 요란스럽게 몰아쳤다.

"암릉 너머에서 누군가 몸을 잡아채려고 심술을 부리는 것 같네요."

동고서저의 암릉길에서 왼쪽 숲길로 우회하는 난간 나무계단을 올라섰다. 화사하게 핀 연분홍 철쭉이 연초록 잎들과 어우러져 반겨줬다. 그리고 다시 암릉에 올라섰는데 이 산의 백미이자 압권인 천애협곡이 구름 속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장가계의 깎아지른 절벽을 보는 듯했다. 협곡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한 절벽은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듯한 풍광이 압도적이었다.

협곡 안은 폭풍우가 몰아치고 안개구름이 짙게 깔려 바위와 구름의 형체조차 제대로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어 절벽에 다가갔다가 사정없이 몰아치는 폭풍우와 끝을 알 수 없는 허공에 소름이 돋아 뒷걸음질 쳤다.

정상을 향하는 완만한 능선길에 또다시 나타난 온갖 기암괴석에 눈이 호사를 누렸다. 남녀의 성기를 닮은 남녀근석이 한꺼번에 나왔는데, 남근석은 누워 있고, 여근석은 툭 튀어나와 그 모습이 얄망궂기 짝이 없었다. 잠시 후에는 난데없이 육중한 덩치의 고인돌바위가 나타났는데, 주변 풍경을 압도하는 그 위풍당당함이 가히 천하일품이었다.

이윽고 도착한 보해산 정상은 비록 조망이 트이지 않았지만 너른 공터처럼 지나온 길 어느 곳보다 순하고 아늑했다. 정상에는 안내판과 정상석, 삼각점, 태양열을 이용한 산불감시 CCTV가 설치돼 있다.

일망무제 아니면 망망대해의 산

보해산은 일명 상대산으로도 불린다. 산의 형세가 그 이름처럼 높고 거대上大한 암릉이 병풍을 이룬 형태다. 더군다나 주능선에 서면 마치 거대한 바다 한가운데 섬 산에 오른 느낌이다. 아마도 날씨의 맑음과 궂음에 따라 일망무제의 조망을 선사하거나 망망대해나 다름없는 보해산 풍광에서 유래했을 법도 하다. 어찌됐든 보해산은 거대한 바다를 뜻한다. 이번 산행은 망망대해에서 뜻밖의 폭풍우를 만난 셈이다.

산정에서 회남재를 향해 내려서다가 외장포 갈림길에서 왼쪽 능선길로 빠지며 하산을 서둘렀다. 산은 여전히 안개구름이 넘실대고 곧장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완만한 능선을 한참 내려서며 구름 속을 벗어나자 딴 세상이 펼쳐졌다. 날머리인 거기마을이 내려다보이고 그 너머로는 금원산과 기백산이 구름 아래 치솟아 있다.

예전에 산불이라도 난 듯한 벌거숭이 능선길에는 초록의 수풀과 연분홍의 온갖 꽃들이 피어나 천상화원을 연출했고, 지천에 난 두릅과 취나물의 향기가 코끝을 자극했다. 그리고 능선을 벗어날 무렵 서울대학교의 정문 조형물을 닮은 '샤' 모양의 부러진 나무가 눈길을 끌었다. 수업을 마치고 퇴교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산을 내려섰다.

능선길을 벗어나 외장포마을 뒷산 임도에 내려서니 거창군의 지역 특산물인 사과농사를 짓는 과수원이 지천으로 보였고 태양열발전시설도 주변에 널려 있다. 산 아래 첫 농가에 닿았을 때는 폭풍우 치는 망망대해에서 뛰쳐나온 고래바위가 배웅을 해줬다. 거대한 바다普海를 지키는 수호신인 듯했다. 오후 7시. 하산을 완료하자 때마침 내리기 시작한 폭우가 사흘 동안 밤낮을 그치지 않고 쏟아졌다.

여행정보

보해산은 백두대간 초점산에서 분기해 시코봉에 이른 후 양각산~흰대미산~회남재~보해산~ 금귀봉~살피재~박유산~합천호에 이르는 33.4km의 양각지맥의 산이다. 거창군의 거창읍, 주상면, 남하면, 가북면, 가조면을 경계로 두루두루 걸치며 솟아 있다.

 

산 이름은 보해사라는 절에서 유래한다. 이 산 서쪽 절골과 그 앞 해인터에 보해사가 여러 암자를 거느리고 있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보해사普海寺·보광사普光寺 모두 수도산에 있다"고 전한다. 수도산은 보해산 바로 북쪽에 접한 산이다.

보해산普海山은 일명 상대산上大山으로도 불렸다. 산은 그 이름처럼 높고 거대上大한 암릉이 병풍을 이룬 형태다. 더군다나 산정에 오르면 마치 거대한 바다普海 한가운데 솟구친 섬처럼 솟아 있어, 덕유산과 지리산, 가야산에 이르는 조망이 일망무제로 펼쳐지는 곳이다.

보해산과 금귀봉 산행은 거의 대부분 거기마을 초입인 거기삼거리를 기점으로 한다. 거기삼거리~금귀봉~큰재~보해산~

외장포마을~거기삼거리 원점회귀 코스를 종주하는 데 5시간쯤 걸린다. 거리는 11.8km다. 만약 보해산만 종주할 시에도 거기삼거리에서 고대마을회관 위쪽의 개울을 건너는 작은 다리 건너 오른쪽 능선을 타면 된다. 고대마을에서 735봉까지는 소나무숲길이며, 735봉에서 보해산 정상에 이르는 주능선은 천애협곡을 둔 암릉길이다. 절벽을 이룬 암릉 곳곳에는 기암괴석과 조망 터가 즐비한 만큼 위험하니 주의하도록 한다.

교통

자가용 이용 시 서울-경부고속도로- 통영대전고속도로-무주IC-37번국도-거기마을 거기삼거리

맛집(지역번호 055)

보해산 남쪽에 자리한 거창읍에 한들식당(945-1419, 된장정식), 우성댓잎(945-1140, 황태탕), 경원해물찜(944-3060, 해물찜), 꽁당보리밥(1353-7040, 보리비빔밥), 명당오리불고기(941-1004, 오리불고기), 구구추어탕(942-7496)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