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예수

문제가 생기면 절친에게 전화하듯이 그분께 나아가는가?

대구해송 2022. 6. 14. 18:23

문제가 생기면 절친에게 전화하듯이 그분께 나아가는가?

 

인생길에 친구가 되어주시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계속 가져라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시절, 하나님께서는 모세라는 지도자를 보내 이스라엘을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광야로 이끄셨다. 이는 마치 사단의 노예가 되어 악한 영에 시달리고 쫓겨 다니던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셔서 사단의 종살이에서 해방해주신 일과 같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종살이에서 해방되는 은혜를 받았어도 이후 거칠고 험난한 광야생활에 지쳐 온갖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들은 광야에서 “애굽에 살던 때가 좋았지. 그땐 비록 노예였지만 집도 있었고 고기도 먹었고 부추도 먹었지”라는 말들을 뱉곤 했다.

 

살다 보면 우리도 그럴 때가 있다. 현실적으로만 보자면 예수 믿기 전엔 이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았다는 생각에 ‘하나님은 왜 우리를 예수 믿게 해서 고달픈 삶을 살게 하시나?’ 하고 회의에 빠지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예수 믿어봐야 달라지는 것이 없네’라며 지나온 애굽 땅으로 돌아가 버린다. 그게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는 마귀의 속삭임에 넘어가 버린 것인 줄도 모른 채 말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려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의 광야 행진은 별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나안은 분명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가나안을 주시려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탈출시켜 광야 생활을 하게 하셨다. 광야를 지나는 동안 애굽의 종노릇하던 옛사람의 잔재를 벗고, 오직 선하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새사람이 되어 가나안에 입성하도록 하셨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만약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천국이 없다면, 우리는 이 땅을 사는 동안 굳이 누구의 지배를 받으며 사느냐에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 마귀의 종노릇을 하며 애굽에서 산다 한들 마귀가 우리에게 더 좋은 것들을 준다면 그걸 받아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다. 죽음으로 모든 게 끝난다면 말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인생이 들의 꽃처럼 잠시 피었다 지고, 그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고 말씀한다. 이 세상의 삶은 잠시이고 죽음 이후 진짜 세상이 열린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어쩌면 우리 영혼은 이와 같은 심판이 있음을 알기에 죽음 앞에서 벌벌 떠는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면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 죄를 귀신같이 알아내어 귀신같이 정죄할 악한 영들이 날뛰며 우리를 고소할 것을 알기에 그토록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라도 맞이하게 될 그 죽음의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해 담대하게 하나님의 품 안에 안기기를 원하신다. 악한 영들의 정죄 앞에서 “내가 죄인인 건 맞지만 예수님의 보혈로 의로움을 입었어”, “예수님이 내 죗값을 다 치르셨어”라고 담대히 외치며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그 천국 안으로 들어가길 바라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날이 오기 전에 우리가 우리의 죗값을 치르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며 이 거친 광야 길을 힘차게 걷길 바라고 또 바라신다. 그러면 비록 광야라 해도 훗날 천국에서 누릴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오는 천국의 기쁨을 미리 맛보며 자유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을 출애굽시켜 그 힘든 광야 여정을 이끌었던 모세에 관한 성경 구절은 이를 확인시켜 준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거친 여정을 이끄는 모세를 인격적으로 만나주시며 그 길에 동행하셨다.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출 33:11)

 

마음이 통하고 말이 통하고 생각이 통하는 친구와 교제할 때만큼 좋은 때가 어디 있을까.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그런 친구와 만나 인격적인 대화를 나누고 나면 속이 뻥 뚫리고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와 같은 친구가 되어주셨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라고 그렇게 안 해주실까?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그와 같은 친구가 되어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친구가 되어 우리와 인격적인 만남을 이어가길 하나님께서도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께 와서 우리 마음의 아픔과 슬픔도 나누고, 불안과 불안정한 생각도 나누고, 아둔한 지식도 나누기를 원하신다.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할 때 그분은 하나님의 완전한 지식과 아름다운 성품과 믿음의 의지를 우리에게 불어넣고 싶어 하신다. 하나님과 평생 동행하는 사람들이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인격을 닮은 새사람으로 변화 받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 여러분은 옛사람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으십시오. 이 새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골 3:9,10) [새번역]

 

수년 전 어느 날, 나는 마침내 꿈속에서도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갖는 은혜를 누렸다. 그 순간을 통해 나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한 연합이야말로 세상 어떤 악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기도임을 알게 되었다.

 

내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다 동원해 하나님께 나를 던지는 순간, 그분은 그 넓고 깊고 따뜻한 인격으로 나를 품으시고 나를 새롭게 하셨다. 내 평생 절대로 풀지 못할 거라 여겼던 문제도 그 순간 스르르 풀리게 하셨다. 내 무의식 깊이 자리했던,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죽음에 대한 마지막 날의 공포와 두려움도 걷어주셨다. 언제 죽더라도 그것이 끝이 아니라 하나님 품에 안기는 진정한 삶의 시작임을 그때 이후 꿈속에서도 믿게 하셨다.

 

그 뒤로 내 인생길에는 내 친구가 되어주시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문제가 생기면 절친에게 전화하듯 하나님께 나아가 미주알고주알 내 마음과 생각을 풀어놓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동행하는 그 시간이야말로 참된 교제이자 사귐이요 안식의 시간임을 알 수 있었다.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때가 가장 즐겁다”라는 고백이 왜 나왔는지도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예배당이나 골방에서만이 아니라 혼자 운전하거나 산책할 때도 내 생각과 감정을 털어놓으며 모든 문제를 하나님과 함께 풀어가곤 한다. 그러면 나를 엄습하던 어두운 그림자가 어느새 걷히고 하나님의 온화한 빛이 나를 에워싸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야말로 어둠의 진영을 무너뜨리는 가장 강력한 능력의 기도요 영적인 기도임을 때마다 알게 되는 것이다.

 


▪나는 기도하기로 했다

하나님의 오랜 침묵에도 어떻게 계속 기도할 수 있을까? 코로나 시대, 하나님의 날개 그늘에서 적어간 기도와 예수 동행과 응답의 이야기. 한근영 / 규장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삼상 12:23)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6)

 

† 기도 : 나만의 골방으로 들어가 하나님께 내 모든 상황을 털어놓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위로가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과 나의 모든 것을 나누며 동행하는 삶에 감사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 적용과 결단 : 매일 하나님과 교제하며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나요? 하나님과 동행하며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하루하루가 되기를 기도하며 결단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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