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예수

복된 교인이 되는 길

대구해송 2022. 6. 14. 18:06
복된 교인이 되는 길




(고전 3:16-23) “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18.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19.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20.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21.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 성령님은 어떤 분인가? >


이 세상에는 신비하고 감탄스러운 일이 너무나 많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볼 때마다 어떻게 그 거대한 것이 조화롭게 자기 자리를 지키는지를 생각하면 너무 신비롭다. 세상의 모든 동식물들도 자세히 보면 신비하지 않은 것이 없다. 사람이 뿜어내는 이산화탄소를 나무가 산소로 만들어 공기를 정화시키는 것도 신비하다. 캥거루 주머니 안에 새끼가 들어있는 것도 신비하다. 그중에서 가장 신비한 사실은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시는 것이다. 그것처럼 복된 사실은 없다.


성령님은 어떤 분인가? 첫째, 우리의 죄로 인해 근심하시는 분이다. 에베소서 4장 30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았느니라.” 성경에 “하나님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예수님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라는 말씀은 없고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라는 말씀만 있다. 그것은 성령님이 삼위일체 하나님 중 가장 감성적인 속성을 가지셨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내가 죄를 범하면 나의 심적 고통 이상으로 성령님이 고통당하신다.


둘째, 성령님은 우리의 선한 변화를 이끄시는 분이다. 성령님은 천성도 복되게 변화시키고 두려움 대신 용기를 가지게 하신다. 필자는 대학 졸업 때까지 남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했지만 지금은 설교자가 되었다. 지금도 남 앞에 서는 것은 늘 부담스럽지만 그때마다 성령님이 힘을 주신다. 또한 성령님은 내 방식과 권리를 포기하게 하시고 남을 쉽게 판단하지 않게 하시고 대의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손해도 감수하게 하신다.


셋째, 성령님은 우리 안에 사랑을 심어 주시는 분이다. 오늘날은 상처가 많은 시대다. 사람들이 나약해져서 비슷한 상황에서도 옛날 사람들보다 더 상처를 받는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용서다. 하나님은 용서의 연쇄 반응을 원하신다. 용서가 없으면 병들고 망하지만 용서하면 병든 부분이 치유된다. 어떻게 용서하는가? 내 힘만으로는 큰 고통과 상처를 남긴 원수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지만 성령님이 도와주시면 용서할 수 있다. 결국 세계 복음화는 나의 용서에 달려 있다.


용서하지 않는 상태로 있는 것은 성령님을 괴롭히는 것이고 용서하지 않는 자신도 괴롭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용서할 능력을 주시는 성령님이 없으면 살 수 없다. 지금 자신의 성격 때문에 고민되거나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때문에 괴롭다면 성령 충만을 구하라. 사람은 사람이 아닌 성령님만 바꿀 수 있다. 늘 나를 세심한 사랑으로 이끌어 주시는 성령님의 감동과 인도를 따라 인생 승리와 교회 승리를 예비하라.




< 복된 교인이 되는 길 >


고린도교회는 초대 교회에서 가장 큰 교회 중 하나였지만 문제도 많았다. 가장 큰 문제는 파당 문제였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쓰면서 그 문제를 가장 먼저 지적했고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해 그 문제와 관련된 말씀을 전했다. 그 말씀의 일부인 본문 말씀이 주는 교훈으로써 복된 교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자신을 거룩하게 지키라


본문 16절을 보라.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사도 바울은 건물이 성전이 아니라 ‘너희’가 성전이라고 했다. 성령님이 성도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구약 시대에는 성전과 성막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영광의 구름인 쉐키나가 있었지만 신약 시대에는 성도 안에 성령님이 계시기에 사실상 성도가 하나님의 성전인 셈이다. 그 성전을 더럽히면 어떻게 되는가?


본문 17절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이 글을 접하고 사도 바울의 반대파는 이렇게 말했을 수도 있다. “사랑의 사도라면서 어떻게 이런 과격한 표현을 쓰는가?” 그러나 사랑과 정의는 같이 가야 하는 것이기에 오래 참는다는 전제 하에서 때로는 강하게 진리와 정의를 위해 말하고 행동해야 할 때도 있다.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멸한다고 바울이 강하게 말한 것은 그만큼 성전과 거룩함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모세 율법에 의하면 성전을 더럽히면 부정하게 되어 죽고(레 15:31) 이스라엘 사회에서 축출되었다(민 19:20). 당시 고린도는 음란한 항구 도시로서 거룩하게 살기 힘든 환경이었기에 거짓 선생들은 정결한 삶보다 영성이 중요하다고 가르쳐서 어떤 교인은 버젓이 음란을 행했다. 그처럼 거짓된 교리로 영적인 성전인 성도와 교회를 더럽히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다고 바울은 강력히 경고했다.


성 어거스틴은 예수님을 믿은 후 옛날 습성대로 자기도 모르게 매음굴로 향하다가 언뜻 정신을 차리고 중얼거렸다. “예수님이 내 죄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셨는데 내가 이러면 안 되지.” 그러면서 자기 팔을 물어뜯어 그의 팔에는 흉터가 많았다. 그처럼 죄와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거룩하게 지켜 내라.


성도 안에 성령님이 계셔도 본능은 그대로 있다. 그래서 신실한 성도도 가끔 죄에 빠진다. 믿음이 가짜여서가 아니라 순간적으로 성령의 인도가 아닌 육신의 본능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거룩하게 지키려면 성령 충만을 받으라. 성령 충만하면 성품이 변화되면서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양보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양보하기에 기쁨과 평안이 넘치게 된다. 또한 남의 단점을 찾기보다 감싸 주고 남을 높이면서 나를 낮출 줄 알게 된다. 그런 성품의 변화는 구원받은 성도에게 꼭 있어야 할 것이다.


초대 교회 교인들은 성령 충만을 받은 후 한 자리에 모여 떡을 떼고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욕심을 부리던 사람이 재산을 다 팔아 나눠주는 변화를 이뤄 냈다. 구원받고 성령 받았다면 마음과 성품과 태도와 삶의 변화는 자연히 따라온다. 그런 변화가 없으면 교회를 크게 짓는 것과 교인이 많은 것과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는 것과 40일 금식기도를 하는 것이 큰 의미가 없다. 신앙생활에서 우선적으로 추구하고 나타나야 할 것은 나의 변화다. 그런 변화를 이뤄 내어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며 살라.


2. 속이지 말고 속지 말라


본문 18절을 보라.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바울은 자신을 속이지 말라고 했다. 그 말씀은 사람들이 자신을 속이며 산다는 암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잘 속고 잘 속인다.


세상에는 속고 속이는 일이 많다. 특히 사기꾼과 제비족은 언행이 그럴듯해서 그 언행에 속으면 마음과 시간과 돈을 빼앗긴다. 순진한 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순수하고 진실하다는 의미의 순진은 좋은 것이지만 너무 순진해서 욕심 많은 사람에게 당하고 불의가 승리하도록 방치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또한 너무 순진해서 헛된 말에 속고 값싼 동정심에 중심을 잃고 불의를 방관하는 것도 좋은 것이 아니다. 때로 뱀 같은 지혜를 발휘해서 멀리할 것은 단호하게 멀리하고 끊을 것은 과감하게 끊으라.


오래전에 착하게 보이는 30대 여성이 남편의 폭력을 피해 무작정 근처 교회로 피신해 들어왔다. 그리고 곧 건달처럼 무섭게 생긴 남편이 뒤따라 들어와 아내의 뺨을 무섭게 후려쳤다. 목사가 급히 남편을 교회 밖으로 내보냈다. 잠시 후 그녀는 목사에게 자기 사연을 말하면서 남편이 가끔 폭력을 써서 너무 무섭다고 했다. 폭행 버릇을 고칠 때까지 남편과 떨어져 살겠다고 수시로 결심했지만 남편이 술이 깨면 눈물을 흘리며 사과해서 계속 받아주게 되었다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녀는 뇌전증(간질) 때문에 친정으로부터도 거의 버림받은 처지였다. 가끔 뇌전증 발작이 일어나면 선하고 고운 외모가 그때만은 다 망가지면서 점차 가까운 사람들도 하나둘 그녀 곁을 떠났다. 그녀에게는 술 먹은 남편의 폭행보다 외로움이 더 무서웠기에 폭행당할 때는 영원히 남편을 떠나겠다고 다짐했다가 다시 남편이 울며 사과하면 자신은 동정심 때문에 떠나지 못하고 남편은 폭행 버릇을 고치지 못하는 악순환이 계속된 것이다.


왜 많은 아내가 폭력 남편의 수중을 벗어나지 못하는가? 남편이 계속 폭력만 휘두르면 이별을 결단하기 쉽다. 같이 있을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남편이 폭력을 휘두른 후 후회하고 자책하는 모습을 보이고 울며 사과해서 값싼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 줄 알아?”라는 거짓되고 위선적인 눈물의 연기에 속아 넘어가고 비록 연기일지라도 세심하게 위해주고 기분 좋게 해 주는 제비족 매너에 속아 넘어가기 때문이다.


한번 손찌검 한 후 눈물로 용서를 빌었다가 또 다시 그렇게 하면 그때는 낭만적이고 기분 좋게 하는 매너로 지극히 위해주어도 단호히 멀리하라. 손찌검을 그냥 참고 넘어가면 버릇이 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어떤 남편은 전혀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바람도 피우지 않고 돈도 넉넉하게 벌어 주는데 아내는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종종 사랑 받지 못하는 느낌을 가지면서 욕구 불만을 품고 외로움에 젖는다.


책임적이고 인격적인 남편은 아내의 욕구 불만을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이만큼 아내를 존중하고 인격적으로 대하고 폭력적이지도 않은데 왜 아내는 나에 대해 욕구 불만을 품을까?” 왜 그런가? 많은 경우에 제비족 매너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아내 앞에서 제비족처럼 거짓된 사랑 연기와 쇼를 하라는 말이 아니라 제비족 이상의 매너로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위해주라는 말이다.


딸을 지극히 사랑해서 딸 바보인 아빠처럼 아내를 지극히 사랑해서 아내 바보인 남편이 되면 아내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나는 책임적이고 인격적이고 돈도 그런 대로 잘 벌고 아내에게도 그런 대로 잘 해.”라고 생각하는 것에 머물지 말라. 아내가 힘들어하면 식사 심부름과 설거지도 해 주고 여행의 동반자도 되어 주고 아내 앞에서 핸드폰 보기, 게임 하기 등을 절제하며 작은 일에서부터 위해주면 아내도 고마워서 남편을 위해줄 것이다.


배우자를 인격적으로 대하고 존중하는 것만 잘하지 말고 제비족 이상의 매너를 가지고 세세한 일에서도 배우자를 위하는 마음을 사려 깊게 적극적으로 표출하라. 그러면 관계는 반드시 행복하게 회복된다. 무조건 사랑한다고 하지 말고 사랑할 때 뱀 같은 지혜와 분별력을 발휘하라. 그래서 거짓된 사랑으로 속이지도 말고 거짓된 사랑에 속지도 말라. 또한 스스로 속지도 말라.


남이 나를 속이는 것도 나쁜 결과를 낳지만 내가 나를 속이는 것은 더 나쁜 결과를 낳는다. 남이 내게 사기 치는 것은 경계해도 내가 내게 사기 치는 것에는 관대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다른 어떤 사기꾼보다 자신이 자신을 더 많이 속일 수 있다. 무엇을 가장 많이 속이는가? 자신을 의롭고 지혜롭다고 여기거나 대단한 존재로 여기는 것이 자신을 속이는 대표적인 사기다. 결국 자기가 똑똑한 줄 아는 것은 미련한 것이고 자기가 미련한 줄 아는 것이 똑똑한 것이다. 자신이 미련한 자인 것처럼 겸손히 자신을 낮출 때 복된 교회 생활이 펼쳐진다.


3.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본문 21절을 보라.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왜 고린도교회에 파당 문제가 생겼는가? 자기가 따르는 리더가 최고라면서 사람을 자랑하는 것 때문이었다. 자랑과 사랑은 거의 반대 개념이다. 사람을 높이지 말고 자신을 높이지도 말라. 사실상 모든 사람은 거의 비슷하다. 믿음과 영성을 자랑하면 남들이 겉으로는 호응하는 것 같아도 속으로는 “찌질이! 못난이!”라고 생각한다.


남들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나중에는 자신도 “내가 그때 왜 못난 행동을 했을까?”라고 생각하며 쓸데없이 자랑했던 순간을 부끄럽게 여긴다. 사람을 영웅처럼 높이면 언젠가 반드시 떨어진다. 요새 어떤 잘 웃기는 정치 목사를 연예인 못지않게 열광적으로 따르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따르는 사람이나 따르는 대상을 다 잘못되게 만든다. 사람을 우상처럼 따르지 말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겸손히 하나님만 높이며 살라.


본문 22-23절을 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때 만물을 주관하는 복된 자가 된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따르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라. 참된 목자의 핵심 조건은 “나를 따르지 마세요. 주님을 따르세요.”라고 말하며 대중을 물리칠 줄 아는 것이다.


늘 나는 그리스도의 것이란 의식을 가지고 살라. 내가 가진 모든 것도 하나님의 것이다. 나의 생명, 시간, 은사, 물질 등을 하나님이 쓰시겠다고 하면 기꺼이 내어드리라. 그때 하나님의 축복도 받고 만물의 통제권도 얻고 기도의 능력도 얻는다. 그런 의미에서 복된 믿음 생활과 교회 생활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사는 것에 달렸다. 더 나아가 내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씀은 내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드리라는 뜻도 있지만 하나님이 나를 보호해 주신다는 뜻도 있고 내가 하나님의 돕는 손길이 되어야 한다는 뜻도 있다.


세상에는 힘든 현실과 장애로 비참하게 사는 사람도 있고 어디에 하소연할 데도 없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하나님의 정의를 간절히 찾는 사람도 있다. 그런 불의한 세상에 하나님이 나를 두신 것은 사랑과 정의를 확산시키는 작은 불쏘시개가 되라는 뜻이다. 불의한 현실은 나 자신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돕는 손길이 되라는 거룩한 초대장이다. 그러므로 힘써 힘을 길러서 의인의 눈물을 닦아 주는 음지의 인물이 되라. 그래서 남은 인생을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인생으로 만들고 복된 교회 생활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라.


- 주일설교(22.06.12) -


 

ⓒ 이한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