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구원의 책이다(2) 김요한목사
구원은 속죄의 구원이 있고 하나님의 창조계획을 완성하시는 구원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속죄의 제사장이시며 중보의 제사장이십니다. 속죄의 구원은 예수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마1:21) 예수는 그 이름의 의미대로 죄인인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죄인이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속죄 제물로 보내심을 받은 사실을 믿으므로 하나님이 이 믿음을 의로 여기시기 때문입니다(롬3:23-24)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창조계획을 완성하시는 구원의 단계로 들어갑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으로 거듭난 사람의 속은 수리되고 소제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성령이 그 안에 들어갈 수도 있고 귀신이 들어 갈 수도 있습니다. 만약 비고 소제된 이후 성령을 모시지 않으면 악한 귀신 일곱이 들어갑니다(눅11:24-26)
처음 형편보다 더 못해 집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대속의 승리로 자기 백성을 마귀에게서 다시 빼앗아 오셨습니다. 귀신은 쫓겨나고 그릇이 비고 소제가 됩니다. 우리가 그릇을 씻는 설거지를 하는 이유는 음식을 다시 담기 위함이죠. 비고 소제가 된 심령은 반드시 주인을 모셔야 합니다. 요한복음의 다락방 강화에서 주님이 약속하신 진리의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요14장) 마지막 설교인 유언이기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이후에 이루어지는 약속입니다. 새 언약입니다. 엔 성령 곧 우리 안(in)에 임하시는 진리의 성령입니다. 인격의 영이십니다. 에피(on) 성령은 표적과 기사로 나타나지만 항상 일어나는 건 아닙니다. 은사의 영이며 사역의 영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한 번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 속에 좌정하시고 영원히 떠나지 않으십니다.
창1장의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의 차이를 보면 다섯째는 생육, 번성, 충만은 같습니다(창1:22) 그러나 여섯째 날에 있는 정복 다스림이 없습니다(창1:28) 하나님이 주신 양식이 다릅니다(창1:29과 30절 비교) 요한계시록은 결국 5일과 6일째의 존재의 싸움입니다. 에피(on) 성령의 역사는 일반인이 볼 때에 미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고전14:23) 진리의 성령은 겉으로는 일반 사람들과 같지만 그 안(in)에서 비밀스럽게 역사하십니다. 그런데 마귀도 그 때마다 성령과 비슷하게 역사를 합니다. 그래서 광명한 천사와 같이 가장한다고 말씀하십니다(고후11:14) 요한복음의 성령과 미혹의 영이 모양은 같지만 열매가 서로 다릅니다. 진리의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경이 보증해 주십니다. 그러나 미혹의 영을 받은 사람은 성경을 자기 식으로 해석합니다. 그런 사람들 많이 보지 않습니까?
요한복음의 구원은 사람의 존재와 기질과 속성(창1:27)이 달라집니다. 문제는 존재는 달라졌으나 속에 있는 주의 영이 행사를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분별력이 없어 달라진 자신의 존재에 대한 정체감이 없습니다. 오락가락합니다. 귀신이 들락날락하듯... 지금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아직 속죄의 구원이 안 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창조적인 구원은 장차 되어 질 미래(소망)로 봅니다. 성령이 임하면 그리스도의 몸짓이 조금씩 나옵니다. 자신이 잘 모릅니다. 나중에 깨닫고 나서는 성령을 사모하여 구하게 됩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성령을 좇아가고자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법을 배우는 거죠. 그래서 로마서적인 구원이 필요한 겁니다.
로마서적인 구원의 결정적인 키 위드는 생각이 달라지는 겁니다(롬8:6절) 그리스도의 동선을 믿고 순종하므로 육신의 생각을 영의 생각으로 전환할 수 있는 자리에 옮겨진 거죠. 영의 생각이 그 속에 누룩처럼 확산이 되므로 내부가 수리됩니다. 사상과 개념이 달라지는 거죠. 영의 생각으로 채우는 것이 바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겁니다(마6:33) 여기서부터 처음 사람 곧 옛사람으로부터 점점 멀어집니다. 사람이 점점 달라지는 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육신의 사람과 대화가 되는 사람은 그들의 생각과 같기 때문입니다. 영의 생각을 가진 사람은 옛 친구가 없어집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강이기 때문입니다(롬8:6) 육의 사람과 영의 사람은 서로 가치관의 대립으로 인해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영의 사람은 육신의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싫어집니다. 비록 몸은 죽어 흙으로 돌아갈 몸이나 영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있습니다(롬8:10). 사람은 육, 혼, 영의 사람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사르키코스) 오감에 의해 사는 동물적인 인간입니다. 혼적인 사람(푸시키코스) 염치가 있고 생각이 돌아가는 사람입니다. 영적인 사람(프뉴마코스) 영과 육의 경계를 파악하고 육신을 좇지 않고 성령을 좇아 사는 사람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영을 통해 혼에 영향을 미칩니다. 생각과 이성과 판단을 통제합니다. 성령이 오신 후에는 자기와 자기 속에 자기 아닌 죄가 있는 것이 분별이 됩니다(롬7장) 그 전에는 한 덩어리가 되어 무조건 자기가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잘해도 자기, 못해도 자기입니다. 성령의 조명은 자신과 자신 속에 있는 죄가 따로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조명을 받아 로마서적인 구원이 우리 속에 일어나야 합니다. 안 되면 속죄의 구원을 받은 감격이 소멸이 되고 맙니다, 자기 속에 있는 죄의 법에 의해 자동적으로 소멸이 되어 갑니다. 그런 사람들 많지요? 사람들은 자기 속에 스스로의 애급이 다 있습니다. 병거와 말의 수를 의지하는 생각이 다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항복이 늦습니다. 열쇠를 가진 대로 다 열어보고 난 다음에 비로소 무릎을 꿇습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육신과 영의 생각이 싸웁니다. 가치성의 대결이죠. 마6장을 보면 하나님과 재물을 두고 안에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최대한으로 수업료를 적게 지불해야 하는데 세상의 가치의 도전이 만만치가 않지요.
결국 우리는 히브리서의 구원의 필요성을 느낍니다. 생각으로 출발하여 어떤 상태의 구원에 이르게 되는데 바로 안식입니다. 히브리서의 구원은 안식입니다. 안식은 내가 누리지만 그 힘의 원천은 살아있는 말씀에서 나옵니다(마11:28) 일을 하면서도 쉬는 것은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는 법을 터득한 겁니다. 주께서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마11:29) 큰 소와 한 겨리가 되어 밭을 가는 작은 소는 큰 소한테 배웁니다. 주와 한 영이 되어 주님께 일을 하면서 안식을 누리는 법을 배웁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기능과 역할이 달라지고 습관이 달라집니다. 주님과 멍에를 함께 메는 요령을 익히는 거죠. 예수님의 삶의 방법이 우리의 모델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힘대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죠. 매사를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함께 하십니다.
이게 바로 주의 멍에입니다. 멍에를 메는 법을 시범으로 보이신 대로 우리가 배워야죠. 진리의 성령 안에서 쉼 곧 안식을 누리면서 일을 하시는 주님의 멍에를 배웁니다. 히1장을 보면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가라사대나 이르시되 하시는 분입니다. 이 분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말씀이 실제화 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므로 그 말씀이 우리에게 체화가 됩니다(요1:14) 우리는 그 이름을 영접해서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을 얻고 그 말씀이 우리 육신 속에 거하므로 독생자의 영광을 보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해 집니다. 아들의 말씀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거죠. 독생자를 받은 사람들이 바로 다생자들입니다. 이들이 바로 하늘들이며 천국민들입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아들로 말미암아 거룩함을 입은 아들들입니다(히2:11) 구원받은 하나님의 후사들입니다. 하나님의 상속자들입니다. 이 일을 하나님의 사자들이 합니다, 천사들은 음성과 나팔(소리와 나팔)로 일을 합니다. 세례요한이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말한 것처럼 말입니다(요1:23) 예를 들어 구원이 떡을 만드는 과정이라고 보면 옛날에는 방앗간에서 가루만 만들어 줬으나 요즘은 아예 떡 까지 만들어 줍니다. 아니 배달까지 해 줍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구원이라는 떡을 만들고 있는가? 구원은 하나님의 all solution입니다. 시작과 끝이며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구속함을 받아 진리의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한 떡 한 몸 한 영이 되어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과 그 목적에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파악하도록 해야 합니다(히3:1) 힘써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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