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 도초면 우이도
섬은 감옥이다. 끊임없이 육지를 갈망하지만 배가 뜨지 않으면 허사다. 그런 의미에서 섬은 자유다. 서로를 속박하는 관계에서 벗어나면 고립은 자유와 동의어다. 서남해의 많은 섬은 오래전부터 정치적 유배지였다.
먼바다의 작은 섬은 굳이 쇠창살이 필요하지 않았다. 험한 바다를 헤엄쳐 건넌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섬으로 유배 보낸다는 건 다시는 한양 땅에 발을 들일 생각을 하지 말라는 엄명이나 다름없었다. 신안군 도초면 우이도도 그런 섬이다.
유배인 정약전과 표류인 문순득
바닷속이 뒤집힌 걸까. 간간이 흙빛을 띠던 바닷물이 우이도가 가까워지자 우유를 풀어놓은 것처럼 푸르스름한 에메랄드빛으로 변했다. 배가 방파제를 돌아들자 제법 높은 산 아래에 여러 채의 민가가 옹기종기 자리 잡고 있다. 한결같이 바다를 닮은 파란 지붕이다.
우이도는 목포에서 뱃길로 65km, 면소재지인 도초도와는 직선거리 8km 떨어져 있다. 주민등록상 인구는 200명이 넘지만 실제는 그 절반 정도만 거주하는 작은 섬이다. 우이도 진리마을에 내리면 가장 먼저 ‘홍어장수 문순득’ 동상이 반긴다. 갓 쓰고 도포자락 휘날리는 복장으로 보아 큰 상인의 풍모다. 마을로 들어서면 이곳에서 유배 생활을 한 정약전 동상이 세워져 있다.
정약용의 둘째 형 정약전(1758~1816)은 성균관 학생을 지도하던 전적(典籍)과 병조좌랑을 역임했지만, 천주교 전교에 힘쓰다 신유박해 때 흑산도에 귀양 가서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그 흑산도가 지금의 우이도다. 먼바다로 나가는 요충으로 1676년에는 흑산진이라는 수군 진지가 설치됐다. 이때부터 우이도는 흑산도로, 지금의 흑산도는 대흑산도로 불렸다.
수군 진지는 사라졌지만 진리마을 어귀에는 영조 21년(1745) 축조한 선창이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 가지런히 돌로 쌓은 타원형 방파제 안쪽은 부두와 배를 고치는 선소를 겸했고, 태풍 때는 인근에서 조업하는 어선의 피항지였다. 선창 중앙에 계주석(벼리목)을 세워 배를 줄로 묶어 두도록 했다.
정약전의 대표 저서로 ‘자산어보’가 꼽힌다. 흑산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근해의 수산물을 조사해 어류 패류 조류 등 155종의 수산 동식물에 대해 기록한 책이다. 이 섬에서 또 유명한 저서는 ‘표해시말(漂海始末)’이다. 홍어장수 문순득의 표류 경험을 세세하게 기록한 책이다.
우이도는 문순득의 증조부 문일장이 들어오며 일대 바다의 상업거점으로 성장했다. 문순득의 5대손인 문종옥(68) 진리마을 이장은 “근해와 먼바다의 경계에 있어 우이도부터 물살이 달라진다. 조류를 이용하기 좋은 위치이자 해상교통의 요충”이라고 말했다.
문순득(1777~1847)은 우이도의 지리적 특성을 활용해 대흑산도권에서 홍어를 비롯한 현지 특산품을 구입해 영산강 수로를 이용해 내륙을 오가며 장사하던 일종의 중개무역상이었다. 그의 나이 25세 때인 1801년 12월 흑산도 인근으로 홍어를 구하러 갔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한다.
처음 도착한 곳은 현재의 일본 오키나와였다. 이곳에서 중국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또다시 풍랑을 만나 이번에는 여송(呂宋·필리핀 북부)에 표착했다. 필리핀에서 중국 마카오로 이동한 그는 대륙을 종단해 베이징을 거쳐 조선으로 돌아왔다. 1805년 1월 8일 고향 우이도로 돌아오기까지 약 3년 2개월이 걸렸다. 조선인 가운데 가장 긴 시간, 가장 긴 거리를 표류한 인물이다.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 문순득은 고향에 유배 온 정약전에게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었고, 정약전은 그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표해시말을 저술했다. 최성환 목포대 교수는 표해시말은 상인 문순득의 뛰어난 관찰력과 실학자 정약전의 치밀함으로 집필된 표류기라 평했다(홍어장수 문순득의 표류기, 표해시말).
표해시말은 표류 노정뿐만 아니라 표착지의 문화와 생활상, 조선어와 현지언어까지 비교해 기록하고 있다. 문순득이 한 지역에 최소 몇 개월씩 체류했기에 다양한 경험을 녹일 수 있었다는 얘기다.
표해시말은 우이도에 전해온 ‘유암총서’에 원문이 필사돼 있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유암총서는 정약용의 제자 이강회가 1818~1819년 우이도에 머물며 집필한 문집이다.
바람이 빚은 모래언덕과 파도가 빚은 반달 해변
우이도 진리마을 반대편 끝에는 돈목마을과 성촌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옛날에는 학생들이 진리마을에 있는
초등학교를 다니기 위해 매일 3km가 넘는 산길을 왕복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이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돈목마을은 넓은 백사장과 특이한 모래언덕 덕분에 관광객이 제법 찾는 곳이다. 집들이 옹기종기 어깨를 맞댄 돈목마을 좁은 골목을 벗어나면 갑자기 시야가 툭 트인다. 약 700m에 달하는 둥그런 해변이 섬 끝으로 연결된다.
인적 없는 해변에 동네 염소가 어슬렁거리고 끊임없이 밀려드는 잔물결에 햇빛이 반짝거린다. 거세지 않은 바람과 살랑거리는 파도소리가 참 좋다. 비치타월 한 장 준비해 그대로 누워 쉬고 싶은 해변이다.
사실 우이도에 들어갈 때만 해도 돌아오기 힘든 곳으로 쫓겨나는 정약전의 심정에 감정이입했는데, 돈목해변을 거닐 때에는 오히려 그가 부러워졌다. 이 섬에서만큼은 죄인의 몸이라도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으리라. 냉혹한 정치판, 번잡한 세상사 잊을 수 있느니 이곳이 진정한 휴식과 자유의 땅 아닌가. 외로움이 사무칠 때까지 한동안 표류해도 좋겠다.
해변 끝자락 성촌마을 오른쪽에 하얗게 모래가 드러난 산등성이가 섬이 자랑하는 풍성사구다. 여름엔 돈목해변에서 불어대는 동남풍이, 겨울엔 언덕 너머 성촌해변에서 몰아치는 북서풍이 모래를 실어 형성된 사구다. 주민들 사이에 ‘산태’라 불리는 모래언덕은 높이 50m에 33도가 넘는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한때는 독특한 풍광 때문에 누드 사진촬영대회가 열리기도 했고, 국내에서 유일하게 모래썰매를 탈 수 있는 곳이라 소문이 나면서 사람이 몰리기도 했다. 자연히 억겁의 시간 조금씩 쌓인 모래언덕이 훼손돼 지금은 사구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돼 있다.
대신 사구 바로 옆으로 탐방로가 놓여 있어 정상에서 작은 사막이 빚은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모래언덕 아래로 길게 펼쳐지는 돈목해변과 마을 풍광이 한 폭의 그림이다. 해변은 잠잠한데 언덕을 넘는 바람에 옷깃이 펄럭거린다. 모래 알갱이가 날리며 또 다른 모래 무늬를 만든다. 사구의 형성과정을 맨눈으로 관찰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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