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예수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길

대구해송 2023. 3. 20. 21:17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길             이한규목사




< 일반화의 편견을 주의하라 >

 사람들은 자기를 높이려고 남을 비판하고 심지어는 비난하고 조롱한다. 그처럼 자기를 높이는 집착이 병적으로 심해지면 다수를 일반화시켜 편견의 올무를 씌우기도 한다. 왜 다수를 일반화시키는 편견에 빠지는가? 그것이 자기를 높이는 효과적인 수단인 줄 오해하기 때문이다. 또한 일반화의 편견이 심각한 불의라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고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볼까 하는 인식과 타인 감수성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1990년 초 필자가 전도사로 섬기던 미국의 한인 교회에 40세 총각이 멀리서 열심히 출석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꽤 열심히 교회를 다녔기에 좋게 보고 담임목사가 그에게 근처 한인 교회에서 일하는 30대 초반의 깔끔한 외모를 가진 여성을 소개해 주었다. 얼마 후 그들의 만남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해서 담임목사가 묻자 그가 말했다. “다른 것은 다 좋은데 A씨 성을 가져서 싫습니다.”

 그때 필자도 같이 있었는데 그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아 말했다. “A씨 성을 가진 사람이면 어떻습니까? 사람만 좋으면 되지 않습니까?” 그가 대답했다. “저는 A씨 성을 가진 사람의 인격을 믿을 수 없어요. 1982년에 A씨 성을 가진 사람에게 사기를 당했는데 그 후 자세히 보니까 A씨 성을 가진 사람은 대략 비슷했습니다.” 그런 일반화의 편견에 사로잡힌 말을 듣고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했다. “저렇게 말하면 남들에게 비인격적으로 보일 수 있고 더 나아가 정신적으로 병들게 보일 수 있다는 인식이나 감수성이 왜 없을까?”

 어느 날 이웃 한인 교회 목사가 필자가 섬기는 교회 담임목사와 하는 얘기를 옆에서 들었다. 그런데 그 노총각이 상대 여성이 싫다는데도 그렇게 결혼하자고 졸라대고 만나기 싫다는데도 너무 전화를 한다는 얘기였다. 그런 사실을 감추고 “A씨 성을 가져서 싫다.”라고 한 것을 보고 담임목사와 저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냥 솔직하게 “그분이 제가 마음에 들지 않나 봐요.”라고 하면 될 것을 자신의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려고 모든 A씨 성 가진 사람을 통째로 매도했으니 얼마나 잘못된 행위인가?

 살다보면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 행동을 노출시키는 부끄러움도 인식하지 못한 채 남의 눈의 티를 확대시켜 말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처럼 일반화의 편견을 드러내면서 자신의 허물과 불의를 인식하지 못하는 부끄러움이 없기를 기도하고 주의하라. 편견적인 언행은 인간사회에 큰 상처와 갈등의 씨앗을 뿌린다. 자신을 높이고 자존심을 지키려는 태도가 지나쳐 사람으로서의 기본 선을 넘지 않도록 하라. 나의 언행을 남들이 지켜본다는 의식과 약간의 타인 감수성만 있어도 일반화의 편견을 지극히 삼가게 된다.

 일반화의 편견은 인간 사회에 큰 악영향을 미친다. 편견은 편견을 가진 자신의 인격을 자신도 모르게 망가뜨리고 자신의 선하고 바른 이미지에까지 먹칠을 하는 태도이고 편견 대상에게는 큰 상처를 남긴다. 사람의 나쁜 본성을 자극하는 사탄의 편견에 사로잡히지 말고 열린 마음과 바른 시선을 가지고 남을 대하라. 악한 자존심을 버려야 하나님으로부터 “네 모습은 어떠냐?”라는 추상같은 질책을 듣지 않는다. 나를 불의하게 드러내려고 하지 말고 당당하게 승부하는 성숙함과 감수성을 갖춘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길 >

 본문 24절에는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나온다. 그처럼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자신을 드러내지 말라

 사울은 회심 후 주님을 만난 뜨거운 체험을 전하려고 다메섹에서 간증집회를 다녔다. 그러나 말씀도 잘 모르고 기도도 하지 않은 채 너무 성급하게 간증 집회를 다니면 영혼을 오도할 수 있음을 점차 깨달았다. 결국 사람을 많이 만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많이 만나자고 다짐하고 아라비아 광야로 은거해 3년 동안 자신의 체험을 구약 말씀에 비춰보며 자신을 성숙시켰다.

 아라비아 광야 생활 후 사도 바울은 실패의 기억을 남겼던 다메섹으로 다시 갔다. 그처럼 어떤 곳에서 한번 실패했어도 두려워하지 말고 충분히 기도하고 준비한 후 다시 그곳에 가서 이전의 실패를 극복하라. 그런 자기 극복의 역사를 이룬 후 사도 바울은 그다음으로 예루살렘에 가서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났다. 다른 사도들과 협력하며 사역하길 원했기 때문이다. 그처럼 나를 감추고 서로 협력하려는 교회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예루살렘 방문 후 사도 바울은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갔다. 길리기아는 그의 고향 지역으로서 가정 복음화와 지역 복음화의 중요성을 도전한다. 그처럼 각지를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면서 점차 그의 명성은 높아졌지만 자기를 드러내지 않아 유대 교회들은 최고의 박해자가 최고의 전도자가 된 그의 소식을 듣기는 했어도 그의 얼굴은 잘 알지 못했다(22절). 그는 자기 얼굴을 드러내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고 예수님만 드러내려고 했다. 그처럼 나를 드러내기보다 하나님을 드러내려고 할 때 하나님이 최고로 영광을 받으신다.

2.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라

 사도 바울의 극적인 변화 소식은 많은 사람에게 충격적인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그처럼 예수님을 믿으려면 화끈하게 믿고 확실히 변화된 모습을 보여 주라.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식으로 믿으면 믿음이 주는 유익과 보람과 생명력을 얻지 못한다. 믿겠다고 결심했으면 확고히 하나님 중심적으로 살고 모든 일의 결과와 죽고 사는 문제까지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라. 그때 능력이 생기고 축복의 길도 열린다.

 나의 변화된 모습을 통해 나에 대한 남의 시각을 좋게 바꿔서 남으로부터 “이상한데, 요즘 그가 많이 변했어. 어떻게 저렇게 달라질 수 있지?”라는 소리를 듣는 주인공이 되라. 그처럼 바른 믿음과 사랑이 넘치는 변화된 모습을 보이고 믿음의 열매를 많이 맺어 나를 통해 누군가가 하나님 앞에 나오면 얼마나 복된 일인가?

 오늘날 교회 성장이 정체된 것은 예전과 같은 순교의 피가 결핍되었기 때문이다. 피를 억지로 흘릴 필요는 없지만 최선을 다해 사랑과 용서의 십자가를 지고 변화된 삶을 보여 주면서 어떤 고난에도 믿음이 흔들리지 말라. 보통 삶에서는 넉넉히 맞춰 주는 여유를 가지되 복음의 진리와 주일성수 문제 등에서는 독실함을 고수하라. ‘오직 예수’로 살 때 변화의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도 영광 받으신다.

3. 최상의 충성을 보여주라

 왜 초대 교회 때 사도 바울의 이름이 사람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는가? 신분이 높고 학력이 높은 핍박자가 전도자로 변화되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즉시 복음을 위해 자신의 인생 전부를 바치는 최상의 충성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충성심을 보이라. 조금 힘들다고 금방 희망을 부정하지 말고 너무 자주 의문을 품으며 따지지도 말라.

 사도 바울은 과거에 나쁜 행동을 했어도 특별히 선택된 사도가 되었다. 그것은 100%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다. 그것이 사람에 대해 절망하지 말아야 할 이유다. 하나님께 힘써 순종하고 충성하며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면 내게 남는 것이 하나도 없이 다 빼앗길 것 같지만 오히려 헐벗지 않고 점차 많은 좋은 것이 더 풍성해진다. 하나님은 순종하고 충성하는 자의 삶을 반드시 기억하고 나의 상상을 초월해 갚아 주신다.

 가끔 하나님의 은혜가 왠지 멀어진 것처럼 느낄 때가 있다. 그때는 먼저 자기 성찰부터 하라. “혹시 내가 요새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충성심이 약해진 것은 아닌가? 내가 좋은 사람과 좋은 것만 추구하면서 정작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는 것은 아닌가?” 사람에게 행복감이 사라지는 핵심 이유는 충성과 헌신의 결핍 때문이다. 충성하고 헌신할 대상을 발견하고 그 대상에게 충성하고 헌신하는 것 자체가 큰 행복의 요소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교회에 충성하고 헌신하는 삶을 통해 큰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4. 고난을 믿음으로 극복하라

 왜 당시 교인들이 사도 바울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는가? 고난을 믿음으로 극복하면서 전도의 열정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나를 통해 가장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때는 내가 고난을 믿음으로 극복하는 모습을 볼 때다. 살면서 어느 누구도 고난을 완전히 면제 받을 수는 없다. 그저 하나님께 고난을 덜 당하는 은혜와 고난을 이길 믿음을 달라고 기도할 뿐이다.

 필자는 목회 초기부터 기도했다. “하나님! 고난이 없으면 겸손한 믿음이 생기기 힘든 것을 잘 알지만 저희 교인은 끔찍한 사고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저는 아직 젊고 마음이 약해서 사랑하는 성도의 장례를 인도할 자신이 없습니다. 10년 이내에는 성도의 장례를 치르지 않게 하소서.” 그 기도가 넘치게 응답되어 지금까지 사랑하는 성도의 장례를 치르지 않은 세월이 벌써 30년이 되었다. 언젠가는 성도의 장례식을 치러야 하기에 마음의 준비는 늘 해도 마음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덜해 주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에 늘 감사가 넘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추구하는 성도를 결코 외면하시지 않는다. 힘들 때도 진심으로 회개하며 기도하면 마음속에 이런 깨달음이 생긴다. “지금의 고난은 더 성숙한 믿음을 주시려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다. 더 큰 아픔이 없도록 앞으로 하나님을 더욱 바라보며 살자.” 하나님은 때때로 사랑하는 자녀에게 작은 재난을 통해 더 큰 재난을 막아주시고 그 과정을 통해 더욱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신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고난과 문제를 되치기해서 축복으로 만들고 하나님께 최고로 영광을 돌리는 복된 심령이 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