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예수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하고

대구해송 2023. 3. 1. 22:02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하고

 

 

(약 2:14~26)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믿음이란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 길 낭떠러지를 가로지르며 와이어를 걸고 외줄 타기하는 서커스가 있었습니다. 워낙 유명한 외줄타기 달인인지라 세계 각국에서 수많은 관람객이 모였습니다. 서커스맨은 관객을 향하여 고맙다는 인사를 한 후 질문을 던졌습니다.

 

“존경하는 관객여러분 제가 이 외줄을 타고 무사히 왕복할 수 있을까요? 그러자 그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기립박수를 치며 이구동성으로 “물론입니다. 당신의 재능 수준이면 이 계곡을 충분히 외줄 위로 왕복할 수 있습니다.” 서커스맨이 다시 깎듯이 절을 하고 외쳤습니다. “나의 재능을 인정해주시고 믿어주시니 감사합니다. 내가 이 계곡을 무사히 왕복할 것을 모두 다 믿었습니다. 자! 이제 누가 나의 어깨에 올라타시면 당신들이 보는 앞에서 안전하게 외줄타기를 행하겠습니다.

 

누가 자청하시기 바랍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갑자기 계곡이 서늘한 분위기에 휩싸였습니다. 그 많은 관중에서 실제로 서커스맨의 어깨에 올라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믿음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마음으로 믿고 행동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참 믿음은 외모로 차별하지 않으며(1~13절), 동시에 행함이 뒤따릅니다. 믿음의 증인들은 행함 없는 믿음이 얼마나 무익한지를 증명합니다.

 

오늘 본문은 참된 믿음은 구체적인 행동이 나타나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본문은 두 가지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죽은 믿음이요, 또 하나는 산 믿음입니다. 죽은 믿음은 행함이 없는 믿음이요, 산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납니다.

 

1. 참된 믿음과 행함이 없는 믿음(14절)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이는 '만약 믿음이 있노라 하고 계속적으로 말만 한다면'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말은 전혀 가치가 없는 거짓이며, 행위와는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이 있노라 신앙 고백을 하면서도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서 행함이 전혀 없다면, 구원에 있어서 유익된 것이 무엇이겠느냐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말로만 '믿음'이 있음을 강조하는 사람들을 향해 경고하면서 믿음의 본질을 설명합니다.

 

참된 믿음은 거듭남에 수반되어 생겨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생활과 행동에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러기에 거듭났지만 변화되지 않은 믿음은 피상적인 것이며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능히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야고보가 사용한 '행함이 있는 믿음'은 바울이 주장한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율법과 복음을 대조시켜서, 인간이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말한 반면에, 야고보는 '복음' 안에서 '믿음과 행위'를 비교하며,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임을 드러내고 동시에, 복음 안에서의 행위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Adamson, Ropes). 행함을 강조한 야고보서신을 잘 못 이해하면 행함이 구원처럼 들립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다는 ‘이신칭의’, 바울의 신학을 반대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야고보는 구원을 받기 위한 행함이 아니라, 구원 받은 사람이라면 행함도 반듯이 따라 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다른 말로 한다면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내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기에는 분명히 생명의 증거가 나타 날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을 받은 인간에게도 생명의 증거가 나타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중생하는 자에게는 더욱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야고보는 생명의 증거를 바로 행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2. 행함이 없는 믿음(죽은 믿음)(15~20절)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죽은 믿음은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말로만 하는 믿음”이요, 또 하나는 “지적인 믿음”입니다.

 

1) 말로만 하는 믿음(15-17절)

(1) 말로만 하는 믿음은 아무 유익이 없는 믿음입니다.(15-16절)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라고 하였습니다. 야고보는 본문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의 예로 가난한 자가 부유한 자를 찾아가서 몸에 쓸 것을 구했을 때, 살 것은 주지 않고 말만하는 자를 들고 있습니다.

 

'형제나 자매'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자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결속된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냅니다. '헐벗다'는 '벌거벗은'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초라한', '남루한' 옷을 입은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궁핍한 자들이 절망의 상태에 있는 것을 강조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일용할'는 '하루를 지내기 위한'의 의미로 하루하루 연명할 양식을 가리킵니다. 야고보는 본문에서 생활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옷과 일용할 양식이 없는 자들에게 행함이 없이 믿는 자들이 하는 세 가지의 '위로의 말'을 예로 들어 그러한 말이 얼마나 공허한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① 평안히 가라.

 

이것은 유대인들이 헤어질 때 사용했던 통례적인 인사법이었습니다. (삿 18:6; 삼상1:17; 20:42; 삼하 15:9; 막 5:34; 눅 7:50; 8:48). 걱정이 쌓여있는 '헐벗고 일용한 양식이 없는 자'에게 이러한 인사는 무의미한 것입니다.

 

② 더웁게 하라.

 

이는 '스스로 불을 지펴서 덥게 하라'는 의미입니다.(눅 22:55; 요 18:18,25). 이는 '옷을 입어라'라는 의미로 앞 절에서 언급한 '헐벗은 것'에 대한 반대어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스스로 옷을 따뜻하게 입을 능력이 없는 자들이기 때문에 본문과 같은 위로는 전혀 가치가 없는 공허한 말에 불과합니다.

 

③ 배부르게 하라.

 

이것은 본래 가축을 방목하여 키울 때 스스로 풀을 찾아 먹는 것을 나타냅니다. 본문은 헐벗고 굶주린 자에게 아무런 실제적인 도움을 주지 않고 '네가 알아서 스스로 배부르게 하라'라고 위로하는 것은 공허한 것이며, 합당치 못한 것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불행한 자들의 몸에 쓸 것을 채우지 않고 앞서 언급한 세 종류의 공허한 말 (① 평안히 가라 ② 더웁게 하라 ③ 배부르게 하라)만 하는 것은 오히려 그들을 차갑게 하는 것이며 깊은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충분히 도와줄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와주지 않고 스스로 믿음이 있노라 하고 떠벌리는 것은 위선에 불과합니다(요일 3:18).

 

요일 3:18절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하였습니다.

 

① 말로만 하는 믿음은 자기를 구원할 수도 없으며,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가 없습니다.

 

② 구원받는 믿음은 입으로 믿는 믿음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는 믿음입니다. *본문에서 형제나 자매가 당하는 궁핍의 정도는 절망적이고, 매우 궁핍한 상태며 도움이 없다면 곧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고 그래서 지나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16절처럼 동정심에 가득 찬 말만 한 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며,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17절).

 

(2) 이러한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17절)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본 절도 역시 가정법을 수반하는 조건문의 형식으로 '만약 계속해서 행함이 없다면'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진실된 믿음의 열매는 '행함'으로 나타납니다. 행함은 믿음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행함'이라는 열매를 맺지 못하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야고보는 여기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올바른 믿음이 아니요, 헛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믿음은 죽은 나무와 같이 아무런 힘이나 능력이 없어서 외부적으로는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꽃이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이렇듯 행함이 없는 믿음은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구원 시키지 못합니다(Burdick).

 

① 살아 있는 믿음은 행함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② 말로만 하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③ 우리의 믿음은 말로만 하는 믿음인가?

 

진심에서 나온 행함이 따르는 믿음인가?를 돌아봐야 합니다. *참된 믿음은 주도적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느낌이상의 것입니다. 그래서 실재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며,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내 몸처럼 생각하고 구제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살아있는 믿음인 것입니다.

 

2) 지적인 믿음(18~20절)

 

(1) 믿음의 표현은 행함으로 됩니다.(18절)

 

“[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본문은 반대자의 주장에 대한 야고보의 답변으로 믿음과 행함을 분리하여 설명하는 자에게 그 증거를 나타내 보이라는 호된 질책입니다. '행함이 없는 네 믿음' 이것은 '행함'과 '믿음'의 분리를 시사합니다. 그러나 행함은 믿음으로부터 온 열매이기 때문에 결코 믿음과 행함은 서로 분리하여 나타날 수 없으며, 믿음이 없이는 결코 행함이라는 결과가 입증될 수 없습니다. 단순히 입술로써 고백만 한다고 해서 그 실체를 입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속사람의 마음가짐인 믿음을 통하여 행함의 열매를 입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반대자에게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고 담대하게 선포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입술로써만 고백하는 믿음이 아니라 살아있는 믿음의 실체를 증거하겠다는 것으로서 행함이 구원의 도구가 아니라 믿음의 증거임을 시사한다(Robertson).

 

① 믿음은 아는 것(지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행함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② 행함이 없는 지식만의 믿음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믿음과 행함은 동전의 양면처럼 결코 분리 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믿음은 냄새가 나는 것도 아니며, 무게가 나가는 것도 아니며,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실체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은 증명되는 것이며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으며, 만질 수 있는 실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볼 수 없지만 믿음의 결과는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학 싶습니까? 그렇다면 믿음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나에게 던질 것입니다. 내 믿음을 네게 보이라 만일 우리가 지적이고 감정적인 믿음이 있다면 19절에서 귀신들도 그 정도의 믿음은 갔고 있다고 충격을 줍니다.

 

(2). 지식만의 믿음은 귀신들에게도 있습니다.(19절)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본 절에서 야고보는 다시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 고백하는 자들의 주장에 대해 언급합니다. 행함은 없고 오직 믿음만을 주장하는 자들의 고백인 '한 분이신 하나님' 즉 유일신을 믿는 믿음에는 야고보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한 분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은 확실한 교리로서 기본적인 것입니다. 또한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는 것 그 자체는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전통적으로 믿고 따라온 중요한 교리입니다(신6:4).

 

*신 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그러나 그 교리 자체가 생명을 살리는 구원의 진리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귀신들도 그 정도까지는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역사하심은 귀신들도 마땅히 아는바 입니다(막1:24).

 

*막1: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그러나 귀신들이 하나님께서 유일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믿지만 그것은 그들을 구원으로 인도하지 못하며 다만 떨게 할 뿐입니다. '떠느니라'은 '털이 곤두서다','떨다'말로 극도의 공포심 때문에 머리끝이 곤두서는 것으로, 영적인 불안과 공포를 의미합니다(Manton). 이처럼 '하나님께서 유일신이시다'라는 믿음은 귀신들과 마찬가지로 지적으로만 받아들이고 입으로만 시인하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구원하는 참된 믿음은 내적으로는 온전한 신앙의 인격체를 만들어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게 하며, 외적으로 믿음에 대한 행함을 나타나게 합니다.

 

①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만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② 더러운 귀신들도 예수를 알고 두려워 떱니다.(막3:11)

③ 이러한 믿음은 구원할 수 없습니다.

 

(3) 지식만의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20절)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허탄한'는 '공허한', '속이 빈'의 의미로 행함이 없는 자들을 향한 말로서 행함이 없는 믿음이 참된 믿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이 전혀 알지 못함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 허탄한 사람'은 영적인 진리를 전혀 몰라 행함이 없는 어리석은 사람을 말합니다. 한편 '헛것'는 원래 곡식이 전혀 없는 땅이나 노예가 일하지 않아서 전혀 소득이 없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행함이 없는 믿음이 수고하지 않아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는 것임을 시사합니다(14-19절).

 

① 참 믿음은 지식의 차원을 넘어 주님을 영접하고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② 단순한 지식과 감정만이 아닌 주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의지의 결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귀신들이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믿음은 1) 먼저 지적인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여기서 한 분이라는 말은 세상에 신이라는 존재가 많지만 오직 하나님만 참된 신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귀신들도 세상의 모든 신들은 가짜며 우상에 불가하지만 하나님만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참된 신이라는 지적인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에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진정한 정체를 가장 먼저 알아낸 존재가 누구입니까? 바로 귀신들 아닙니까? 그들은 정말 귀신 같이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 보았습니다.

 

2) 귀신들은 감정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 떨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귀신들을 만나는 장면을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께 엎드립니다.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의지적으로 순종 하지는 않습니다. 만일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지적이고 감정적인 믿음이 있다 할지라도 의지적으로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행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귀신의 믿음과 다를바 없다는 것입니다. 지성만 채우는 묵상은 되고 있지 않습니까? 나의 묵상은 실제적인 행함으로 나가고 있습니까?

 

2. 참 믿음의 실례(산 믿음)(21~26절)

 

1) 아브라함의 믿음(21~24절)

 

(1) 아브라함은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음(21절)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라고 하였습니다. 야고보가 '아브라함'을 예로들면서 '우리 조상'이라고 표현한 것은 수신인이 유대인임을 시사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이었고,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입니다(요 8:53; 행7:2; 롬 4:1). 한편 '바칠 때에'라고 한 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리기로 작정하고 그 의지를 실천에 옮겼기 때문입니다. 즉 사실상 하나님께서 그 뜻하신 바를 실행치 아니하셨을지라도 아브라함은 실제로 아들이삭을 드렸을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 부가 의문문의 형태로 사용된 '아니냐'는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야고보의 표현 방식입니다. 한편 '의롭다 하심을 받은'는 '의로 여기다'라는 의미로 개인의 주관적인 주장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모든 사람이 의롭다고 인정할 만한 선포 행위를 일컫습니다. 이러한 의롭다함은 '행함으로' 즉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비로소 선포되었습니다(창 22:1-14).

 

(2) 믿음과 행함의 관계성을 보여줍니다(22절)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본절은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논증으로 '믿음'과 '행함'과의 관계성을 보여줍니다. '네가 보거니와'는 '누가 보아도 알 수 있는 증거가 명백할 정도로 충분한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네 가 보느냐'라는 의미로 다시 한 번 믿음만을 강조하는 자들을 향한 야고보의 권고를 나타냅니다. 야고보는 본절에서 '의롭다 함'의 근거가 오직 행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의롭다 하심은 오직 행함만이 아니라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과 '행함'은 불가분리의 근본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닌 죽은 믿음이며, 반대로 믿음이 없는 행함은 올바른 행함이 아닙니다. 믿음은 행함의 원칙으로 행함과 함께 역사하며, 믿음의 바탕 위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결과가 행함입니다(Burdick). 그러한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믿음도 행함으로 온전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의 필연적인 결과로 행함이 나타날 때 믿음은 온전하게 될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습니다(23절).

 

“[23]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성경에 이른바'는 창 15:6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 15:6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시고” 나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창 22장의 사건까지는 30년의 시간이 흐릅니다. 창 15장에서의 아브라함의 의(義)는 이미 '완전한 의' 였습니다. '응하였고'는 성경말씀을 '실행 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릴 때 이미 믿음이 전제되어 있었으며, 그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자체가 창 22장의 사건을 낳는 근거가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창 15:6의 아브라함의 의는 이삭을 드릴 때 비로소 완전해진 것이 아니라 이미 15장에서 완전한 '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쳤을 때 이러한 믿음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Bu-rdick). 따라서 야고보의 주장과 바울의 주장은 서로 상반되고 모순되는 것이 아닙다. 다만 서로 다른 측면 즉 행함과 믿음의 측면을 각각 강조한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창 22:1-14절은 창 15:6을 응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 '하나님의 벗'(필로스 데우)이라는 칭호는 야고보가 사용하기 이전에도 이미 일반적으로 사용된 칭호입니다(대하 20:7; 사 41:8, Phillo). 야고보는 이 칭호를 사용함으로 '믿음'과 '행함'을 통해서 '의'로 여김을 받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깊이 교제를 나누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친밀한 교제를 유지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숨기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창18:17). 예수께서도 십자가의 비밀을 안 제자들에게 '이제부터는 종이라 하지 아니하고 친구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요 15:15).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친구라 함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렸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는 것으로 아브라함에게 전적으로 특권을 부여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Knox).

 

(4)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음(24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본 절에서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예를 통하여 전체적인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이란 정적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올바른 반응인 행함으로 나타납니다. 즉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서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믿음으로 만 아니니라'은 믿음도 우리가 가져야 하는 필수적인 것이고, 또한 아브라함처럼 행함으로써 나타내 보여야 하는 것임을 시사합니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은 믿음으로만이 아닙니다. 믿음을 통한 행동으로써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문은 바울이 엡 2:8,9에서 주장한 것과는 의미상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야고보의 주장은 진실 된 믿음으로 인하여 행함이 산출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고(22절), 바울 또한 우리의 구원이 행함으로써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직 믿음이 있는 자는 선행을 무시하지 않는 자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결코 믿음과 행함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바울은 다만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한 율법주의자들을 대상으로 말하였고(롬 3:20,28) 야고보는 그리스도인 가운데 행함과 믿음은 별개라고 주장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Martin). 따라서 바울과 야고보의 주장은 동일한 것입니다(Burdick).

 

① 아브라함은 이삭을 다시 살리실 줄을 믿었습니다.(히11:19)

② 그 믿음은 이삭을 제단에 드리는 행함으로 나타났습니다.

③ 그 행함은 그의 믿음을 증명하였습니다.

 

2) 라합의 믿음(25~26절)

 

(1)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음(25절)

 

“[25]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본 절은 라합의 예입니다. 라합은 이방인이었습니다. 야고보가 라합을 예로 든 것은 아마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어떤 특정한 민족이나 한정된 사회 계층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합니다 (Calvin). 라합은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기생 이었고, 이방인 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믿음에 근거한(수2:8-13; 히 11:31) 행함이었습니다.

 

그녀가 죽음을 무릅쓰고 사자(使者)들을 도피시킨 것은 신실한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그녀가 의롭다함을 인정받은 것은 모든 사람 앞에서 신실한 믿음을 인정받은 것을 가리킵니다. 실제로 그녀는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날 자신뿐만 아니라 부모, 형제, 친척과 더불어 구원을 받았으며(수 6:23), 다윗 왕과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마 1:1,5,6). 그래서 후대에 신앙의 모범적인 인물로 기록되었습니다(히 11:31). 야고보의 이러한 주장은 그녀의 과거 생활이나 거짓말했던 것을 간과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녀의 믿음에 의한 행위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2)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26절).

 

“[26]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는 본 절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을 영혼 없는 몸, 즉 시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산 믿음이라면 반드시 행함이 뒤따라야 하며, 행함은 반드시 믿음에 기초해야 함을 암시합니다. '영혼'은 일반적으로 '영'(spir-it)이라고 번역합니다(NIV, NASB). 그러나 본문에서 야고보가 사용한 비교는 창 2:7을 근거한 것으로 창세기의 '생기' 즉 생명을 주는 '호흡'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왜냐하면 숨을 쉬지 않는 것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나 다름없으며 만약 야고보가 '영'으로 보았다면 '프쉬케'('영혼')를 사용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① 기생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승리할 것을 믿었습니다.

② 그 믿음은 그 사자들을 접대하는 행함으로 나타났습니다.

③ 그 행함은 그의 믿음을 증명하였습니다.

 

*저자는 의도적으로 양극단에 있는 두 사람을 예를 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남자며, 라합은 여자입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이고, 라합은 이방인입니다. 아브라함은은 유명한 인자이지만, 라합은 천민입니다. 아브라함은 성경의 중요 인물이지만, 라합은 보조적인 인물입니다. 이 두 사람이 가지는 공통점은 바로 행하는 믿음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누구인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 그리고 외모와 학력과 족보가 어떤지 보지 않습니다.

 

다만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졌는지를 볼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는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참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납니다. 참 믿음은 행함이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영혼 없는 몸과 같습니다. 행함이 따르지 않는 말로만 하는 믿음이나 지식으로만 아는 죽은 믿음을 넘어서서 행함이 따르는 참 믿음을 가지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말과 행실이 다른 것이 ‘가장된 경건’이라면(1:26,27), 말만 하고 행함이 없는 것은 ‘거짓 믿음’입니다(14,20,26절). 행함 없는 믿음은 부족하거나 연약한 것이 아니라 숫제 믿음이 아닙니다. 열매 없는 나무처럼 아무 유익이 없고, 숨쉬지 않는 몸처럼 죽은 믿음일 뿐입니다. 믿음은 관념이 아닌 관계이고 신념이 아닌 신뢰이기에 거창한 이론이 아니라 진실한 행함으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2) 평안을 기원하면서 헐벗은 지체의 필요에 눈감는 무정함을 지적합니다(15~17절). 나누고 베풀지 않으면서 기도만 하는 이중성에 대한 질책입니다. 믿음과 행함처럼 기도와 삶도 분리 될 수 없습니다. 기도한 대로 살아야 하고, 사는 만큼 기도할 수 있습니다. 말만 하고 사랑하지 않는 것이나, 기도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것은 선의를 가장한 위선일 뿐입니다. 말로 실천을 대신하면 죽은 언어이고 죽은 믿음입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고 위기를 넘길 수 있도록 어서 지체에게 손을 내미십시오.

 

3)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사람을 예로 들어, 행함과 믿음을 구분하려는 시도를 반박합니다(18~20절). 믿음과 행함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순종으로 나타나지 않는 ‘믿음의 방식’이라면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닌, 자기 충족적 신념일 뿐입니다. 지적 동의나 감흥도 믿음이 아니며, 올바른 지식이 항상 올바른 삶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도리어 실천하지 않는 그 지식이 나와 남을 차별하는 교만한 도구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알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진리대로 살지 않는다면 그 믿음도, 인생도 허탄할 뿐입니다.

 

4) 아브라함과 라합은 행함으로 참 믿음으로 보인 사람들입니다(21~25절). 그들은 외모(혈통, 신분, 성별 등)가 아닌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임을 입증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아브라함은 아들을 바치라는 요구에도 주저 없이 순종하여 참 믿음을 입증했고, 라합은 목숨을 건 행함(수2:11)으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보였습니다. 이것이 구원 얻은 믿음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내 믿음의 산 증거는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