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내 마음속으로의 여행…임실 섬진강 길

대구해송 2022. 6. 14. 21:06

임실 섬진강 상류. 신록이 비친 잔잔한 수면이 아름답다
섬진강을 따라 나 있는 19번 국도는 풍치가 가장 멋진 길 중 하나로 꼽힌다. 전남 구례와 경남 하동을 잇는다. 이곳보다 더 아름다운 길이 섬진강 상류에 있다고 말하고 싶다. 임실 구간 섬진강 길이다. 전북 임실군 덕치면 물우리 마을에서 진뫼 마을∼천담 마을∼구담 마을을 잇는 11㎞ 길이다.

사람 내면의 아름다움을 닮은 강



섬진강은 물줄기가 지나가는 지역에 따라 몇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임실 관촌 지역에서는 오원강, 임실 운암 지역에서는 운암강, 순창에서는 적성강, 곡성에서는 순자강 혹은 압록강 등으로 일컬어진다. 모래가람, 다사강, 두치강 등의 이름도 갖고 있다.

소설 '혼불'의 작가 최명희는 운암강에 대해 '구름이 몸을 이루면 바위가 되고, 바위가 몸을 풀면 구름이 된다'고 표현했다. 섬진강 상류에는 강물 가운데 운치 있는 큰 바위들이 군데군데 흩어져 있다. 마치 작은 도담삼봉들이 모여있는 것 같다.



최명희의 표현은 검은 바위들 위로 물안개가 서렸다가 걷히길 반복하는 풍광을 묘사한 것 같다. 아침이면 바위가 몸을 풀어 안개가 되고, 해가 나면 안개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바위라는 몸을 이룬다는 의미 같다. 자연과 깊이 공감하지 않고는 자연의 변화를 이처럼 심오하게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강물 가운데 큰 바위들이 흩어져 있다
섬진강 상류는 국내 주요 강 중 드물게 자연이 잘 보존된 곳이다. 우리나라 큰 강 주변에는 도로, 철도가 나 있거나 숙박시설, 상가, 주택 등 크고 작은 건물들이 들어선 곳이 많다. 하지만 임실 섬진강 변에는 갈대와 수초가 뒤엉킨 습지가 청정한 자연의 진수를 이루고, 자그마한 마을들이 들어선 것 외에는 별다른 시설이 개발돼 있지 않다.

봄의 절정을 맞아 아카시아, 오동나무, 이팝나무에 덩실덩실 핀 하얀 꽃들이 탐스럽고 풍요했다. 뿌리를 약재로 쓰기 위해 심은 작약밭에는 빨강, 분홍, 하양 꽃들이 만발해 나그네의 넋을 빼놓을 지경이었다.

뿌리를 약재로 쓰기 위해 심은 작약밭
이완우 임실군 문화관광해설사는 "평화롭고 고요하며 깨끗한 섬진강 길은 내면적 아름다움을 보여준다"며 "이 길을 걸으면 자연스레 자신의 내부를 향한 여행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섬진강 상류는 화려하거나 시끌벅적한 관광지가 아니다. 정결한 자연이 선사하는 적요 속에서 체험하는 평화와 고요는 사람 내면의 아름다움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섬진강은 남한에서 네 번째로 큰 강이다. 노령산맥의 동쪽 경사면과 소백산맥의 서쪽 경사면인 전북 팔공산에서 발원해 전남과 전북의 동쪽에 있는 지리산 기슭을 지나 남해 광양만으로 흘러든다. 길이 약 212㎞, 흔히 오백 리라고 하는 섬진강은 전라도와 경상도를 넘나들며 산과 들을 적신다.



구례 같은 너른 들판을 건너기도 하지만, 작은 마을들과 지리산 자락을 끼고 돌며 숱한 목가적 강변을 만들어낸다. 큰 강 중 가장 오염도가 낮고, 정겨운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진뫼마을 앞 징검다리

산과 강이 그려낸 한 폭의 산수화



임실 섬진강 길은 물우리, 진뫼, 천담, 구담 4개 마을을 잇는다. 이 길은 걷기에 좋지만, 유명한 자전거길의 일부이기도 하다. 섬진강 자전거길은 임실 생활체육 공원에서 시작해 전남 광양 배알도 해수욕장까지 총 174㎞를 달려간다. 섬진강 변을 따라 조성돼 전국 자전거길 가운데 자연미를 잘 살린 길로 평가받는다.

우리가 걷는 동안에도 적지 않은 라이더들이 자전거를 타고 휙휙 지나갔다. 햇볕 환한 강변에서 부드럽게 바람을 가르며 능숙하게 달리는 라이더만큼 매혹적인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고독하지만 외롭지 않은 자유인의 모습들이다. 자전거 여행으로 책을 2권 펴낸 김훈 선생이 떠오른다. 시대를 고민하고, 나라와 사람을 염려했던 선생은 두 바퀴 자전거로 국토를 속속들이 느끼고 싶었던 것 같다.

물우리는 동네가 강 바로 위에 있어 물이 범람할까 걱정이 끊이지 않은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 물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뜻이 담겼다는 설도 있다. 이리 풀이해도, 저리 해석해도 섬진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마을임이 지명에서부터 나타난다.

앞 강에 푸른 물이 넘실거리고 당산나무와 정자, 작은 연못이 어우러진 물우리 사람들은 저마다 당산 할매에게 마을의 풍년과 안녕을 빌었다. 물우리와 진뫼마을 사이에 섬진강 물과 회문산에서 내려온 계곡물이 만나는 두물머리가 있다. 두물머리를 내려다보는 곳에 밀양 박씨 종중이 세운 월파정이 있다. 밤이 내리면 물소리가 더욱 생동하는 두물머리에 파도처럼 퍼지는 달빛의 정취가 느껴지는 듯했다.

김용택의 작은 학교
진뫼 마을은 섬진강 시인으로 통하는 김용택 시인이 나고 자란 곳이다. 그의 생가터에는 임실군이 조성한 '김용택의 작은 학교'가 있다. 김용택 시인은 섬진강을 터전 삼은 민초들의 건강하고 끈질긴 생명력을 묘사한 작품들을 남겼다.


새로운 미래상을 탐구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 읽고 대화하는 공간인 작은 학교에는 '회문재'(回文齋, 글이
모이는 집)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마을 앞 아름드리 정자나무의 그늘이 깊고 넓었다.

천담 마을은 강과 못으로 이루어진 동네란 뜻이다. 조용히 흐르는 강물과 군데군데 물속에서 솟아오른 바위가 신비를 자아낸다. 사랑하던 처녀, 총각이 불어난 물로 인해 생사가 엇갈린 이야기가 전설로 내려오는 곳이다. 그들의 슬픈 사랑을 애도하는 동자바위가 마을 어귀에 세워져 있다.

산자락을 휘돌아가는 섬진강


구담 마을은 못이 아홉 개에 달한다는 데서 그 명칭이 유래했다. 섬진강 상류 끝자락에 위치한 구담은 영화 '아름다운 시절' 촬영지이기도 하다. 구담 마을은 언덕에 자리 잡았다.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강변 풍경이 일품이었다. 산자락이 지그재그로 겹치고 그 사이로 강물이 휘돌아 간다. 언덕에는 뿌리가 드러난 굵은 당산나무들이 몇 그루 있었다. 뿌리가 연결된 '연리근'이 신령스러웠다.

'임실'이라는 지명은 알찬 열매를 맺는 곳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 지명은 백제 때부터 쓰였다. 호남의 젖줄인 섬진강이 몸을 둥글게 말아 산을 휘돌아 흐르며 만들어낸 동네가 임실이다. 국어 교사로 정년 퇴임한 이완우 해설사는 군 이상 단위의 지역 중 이름을 2천 년 가까이 지켜온 곳은 임실이 유일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만큼 임실의 뿌리는 깊다.

옥정호와 내장산

임실 섬진강 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옥정호와 내장산이 있다. 옥정호는 1965년 최초의 다목적 댐인 섬진강댐이 만들어지면서 생긴 인공호수이다. 임실군 강진면 용수리와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 사이에 있는 섬진강 협곡에 댐이 축조되면서 생긴 저수지이다.

옥정호의 등장으로 섬진강 하류 지역이 만성적 홍수와 가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또 수력발전에 이용된 유수를 동진강으로 유역 변경시킴으로써 동진강 하류, 계화도 간척지 등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게 됐다. 옥정호는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물안개가 장관이기 때문이다. 외앗날이라고 불리는 붕어섬도 빼놓을 수 없는 명소이다.

신록이 피어나는 내장산 
내장산은 섬진강 상류에서 자동차로 3040분 걸리는 거리에 있다. 가을 단풍이 아름다워 예부터 조선 8경 중 하나로 꼽혔다. 내장산국립공원으로 들어가는 도로는 편도 1차선이어서 단풍철에는 북새통을 이룬다. 울긋불긋 물들지 않아도 내장산 단풍나무 숲은 울창하고 그윽하다. 봄, 여름 나들이 장소로 손색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