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핵심은 ‘대상’… 크기는 다음 문제
▲한은택 목사
신앙생활에 있어서, ‘믿음’이라는 것은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기독교 신앙에 가장 중요하다고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음’이라는 단어만큼 추상적이고 모호하게 생각하는 단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믿음’에 대해서 ‘크기’를 강조합니다. 믿음이 크면 하나님께 응답을 받고, 믿음이 작으면 응답을 받지 못한다. 믿음이 세면 하나님께서 응답을 하시고, 믿음이 약하면 응답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게’ 믿고 ‘크게’ 믿으려고 노력을 합니다. 기도하고 잘 믿어지지 않을 때에도, 억지로 힘을 주어가며 “믿쉽니다!” 강조하며 기도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성경은 우리의 믿음에 대해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믿음은 크기와, 세기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카슨(D. A. Carson)이라는 신학자는 한 가지 예를 들고 있습니다.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이집트의 모든 첫째 아들을 심판하실 때 이스라엘에게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이집트를 심판하시다가, 양의 피가 발려진 문설주를 보시면 그 집을 넘어가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양의 피를 발랐습니다. 그런데 그 때, 두 명의 이스라엘 백성이 있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A라는 사람은 피를 바를 때, 속으로 의심을 하면서 발랐습니다. ‘과연 피를 바른다고 무슨 일이 일어날까? 지금 두려운 나의 마음이 피를 바른다고 뭐가 나아질까? ’ 마음에 의심을 하면서, 문설주에 피를 발랐습니다.
그런데 반면에 B라는 사람은 확신을 하면서 피를 발랐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인데, 당연히 해야지. 뭔가 특별한 구원이 있을거야’ 생각을 하며, 믿음을 가지고 피를 발랐습니다. A는 의심을 하면서 발랐고, B는 확신을 가지고 발랐습니다.
그런데 그 날 저녁, 하나님의 천사가 이집트에 내려와 첫째 아들들을 심판할 때에, 의심을 하면서 발랐던 A의 집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믿음이 약했고, 의심을 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발랐던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집도, 하나님의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확신을 가지고 피를 발랐던 B라는 사람도 당연히 구원을 받았겠지만, 의심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양의 피를 바른 A라는 사람도 구원을 받았습니다.
믿음에 대한 중요한 영적인 원리가 이 이야기에 담겨져 있습니다. 믿음은 ‘세기’와 ‘크기’, 나의 확신의 문제가 아니라, 믿는 ‘대상’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의 신앙이 크고, 세고, 확신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믿는 대상이 다르면 그 믿음은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이 연약하고 부족하고, 겨자씨만한 믿음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전능하신 하나님’ 이시라면, 우리의 믿음은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작은 신음소리에도 응답을 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십자가에서 그 아들을 죽이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좋으신 아버지께서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시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나의 노력이 아니라, 나의 믿음의 크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크심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장로교의 창시자 존 칼빈은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Saints)’이라는 핵심적인 교리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구원하신 성도는 끝까지 참으시고 인내하시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여 주신다는 핵심적인 이야기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넘어지고 쓰러지고 세상의 쾌락에 빠지고 질병과 물질의 시험에 들어서 신앙을 저버리기 까지 우리의 믿음이 연약해질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구원의 확신조차 흔들릴 때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우리의 믿음이 연약해지고 확신이 흔들릴 때에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미쁘시고 신실하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생을 주셨으니 아무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우리 믿음의 ‘크기’가 아니라 ‘세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크심’이 우리의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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