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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본때 / 황동규

대구해송 2017. 10. 22. 22:41





   


    삶의 본때 / 황동규



구닥다리 가방처럼 혼자 던져져 있는 가을밤,
베토벤의 마지막 4중주가 끝난다.
창을 열고 내다보니 달도 없다.
마른 잎이 허공에 몸 던지는 기척뿐, 소리도 없다.

외로움과 아예 연 끊고 살지 못할 바엔
외로움에게 덜미 잡히지 않게 몇 발짝 앞서 걷거나
뒷골목으로 샐 수 있게 몇 걸음 뒤져 걷진 말자고
다짐하며 살아왔것다.

[……]

무엇이 건드려졌지? 창밖에 달려 있는 잎새들의 낌새에
간신히 귀 붙이고 있던 마음의 밑동이 빠지고
등뼈 느낌으로 마음에 박혀 있던 삶의 본때가
몸 숨기다 들킨 짐승 소리를 낸다.

한창 때 원고와 편지를 몽땅 난로에 집어넣고 태운
외로움과 구별 안 되는 그리움과 맞닥뜨렸을 때 나온 소리,
‘구별 안 될 땐 외로움으로 그리움을 물리친다!’
몸에 불이 댕겨진 글씨들이 난로 속을 뛰어다니다
자신들을 없는 것으로 바꾸며 낸 소리.

 Forever / Steve Rai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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