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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잘 쓰는 방법

대구해송 2017. 2. 6. 07:04

시란 무엇인가

시는 오직 인간만이 쓰고 있다.
인간 이외의 다른 존재는 일찍이 시를 써본 일이 없다. 컴퓨터가 쓴 시는 그럼 뭐냐 할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인간이 컴퓨터한테 시를 입력 시킨 결과일 뿐이다. 제 아무리 정교한 컴퓨터라도 인간의 입력없이 스 스로의 뜻으로 시를 쓰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시를 쓰는 능력은 인간을 인간으로 있게 하는 특질의 하나가 아닐 수 없다. 바꾸어 말하면 모든 인간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시를 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그리고 그 때문에 다른 존재와 구별되는 특이한 존재인 것이다.

 실제로 인간은 상한을 알 수 없는 아득한 옛날부터 오늘 현재에 이르 기까지 무수하게 많은 시를 지어내고 있다.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달하 여 시 같은 것은 이제 발붙일 곳이 없게 되었다는 한탄이 전 세계에 널 리 퍼져 있는 현대에 있어서도 시의 생산량은 줄기는커녕 오히러 늘어 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시의 줄기차고도 유구한 역사는 그 자체가 이미 어느 시대에 있어서나 새로 시를 쓰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나 타난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오늘날의 우리 사회 역시 그 예외가 될 리는 없다. 아주 많은 것은 아닐지 몰라도 일반적 통념이 막연하게 추정하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많은 시의 지망자들이 도처에서 남몰래 열심히 시의 트레이닝을 거듭하 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들의 가슴 속엔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쓸 수 있을까]하는 안 타까운 소망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 은 시의 본질이나 원리보다도 막상 시를 쓰려고 할 때 당장 표현 방법 상의 이런저런 어려움에 기인하는 안타까움이다. 그리하여 고민을 한다 면 시의 지망자들과 함께 시 창작의 여러 가지 구체적인 방법론을 생각 해 보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시 창작의 방법론이라 했지만 실상 시에는 그렇게만 하면 틀림없이 물건이 된다는 방법론의 모범 답안이 없다는 말부터 먼저 해두어야 하 겠다. 기대에 어긋난다 할는지 몰라도 그점에 관해서는 나에게 잊지 못 할 추억이 있다. 벌써 4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부산 피난시절의 일이 다. 당시 학생으로서 출판사의 아르바이트 교정원 노릇을 하고 있던 나 는 어느 날 회사일로 대구에 가서 역시 그곳에 피난중이던 선배 시인 조지훈을 처음 만났다. 그는 나를 끌고 문인들이 모이는 어느 술집으로 갔고 또 그 술자리가 파한 뒤에는 한 동안 나와 함께 밤길을 걸었다. 그 렇게 단둘이 밤길을 걸으면서 나는 술기운을 빌어 평소 가슴 속에 뭉쳐 있던 제일 큰 물음을 지훈에게 털어놓았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쓸 수 있을까요?" 그러자 그는 일언지하에, "그건 방치할 수밖에 없는 일이오.".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그는 나의 무안함을 덜어주려는 듯 자 기도 그 말을 정지용에게서 들었노라고 덧붙였다. 그 후 나 자신이 또 한 여러 번 써먹은 일이 있는 그 말의 의미, 그것이 바로 시에는 모범답안적 방법이 없다 는 사실인 것이다. 미국의 작가 싱클레어 루이스 (Sinclair Lewis)는 어떤 대학에서 소설 창작론의 강좌를 맡았을 때 그 첫 시간에, [학생 여러분이 정말 소설을 쓰고 싶다면 지금 당장 집으로 돌아가서 뭐든지 쓰기 시작하라]고 말했다는 일화를 남기고 있다. 표현은 다르지만 뜻은 완전히 조치훈의 [방치]와 일치하는 발언이다. 이처럼 모범답안이 없다는 것은 시와 문학이 그만큼 어려운 작업이라는 뜻으로 통한다. {보봐리 부인}의 작가 G. 플로베르(Gustav Flaubert)는 그 어려움 을 보다 절절하게 호소하고 있다..

말 한마디를 찾아내기 위해 꼬박 하루 동안 두 팔로 머리를 싸안고 가엾은 뇌수를 짜는 일이 무엇인지를 당신은 아마 모르실 겁니다. 당신에겐 사상이 폭넓게, 그리고 다함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나의 경우는 그것이 보 잘 것 없는 실개천입니다. 폭포를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난 대공사가 필요 합니다. 나의 인생은 심장과 두뇌를 짜서 마침내 그것을 고갈시키기 위한 과정입니다.

이 인용문은 플로베르가 평소 짝사랑의 감정을 품고 사귀었던 연상의 여류작가 조르쥬 상드(George Sand)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이다. 세계 의 문학사에 하나의 커다란 봉우리로 솟아 있는 대작가 플로베르조차도 이처럼 비통하게 그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 문학인 것이다. 시는 물론 그러한 문학의 한 장르에 속한다. 아니 그러한 문학 중에서도 시는 언어에 대한 태도가 특히 엄격한 장르인 것이다. 더욱 어렵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시에 뜻을 둔 사람들은 이 말에 주눅을 들 필요가 조금도 없다. 인생만사 누워서 떡먹듯 쉽게 되는 일이 어디 있는가. 설령 있다 해 도 그것은 가치 없는, 따라서 일부러 마음먹고 할 일이 못 되는 것이다. 마음먹고 해볼 만한 가치있는 일은 그 종류 여하를 막론하고 어렵기 마련인데 시와 문학이 그 중의 하나임은 구태여 두말할 나위가 없다. 플로베르는 그렇기 때문에 자기 인생을 [심장과 두뇌를 짜서 마침내 그것 을 고갈시키기 위한 과정]으로 만들 만큼 문학에 전력투구를 한 것이다. 그의 불후의 명성은 재능의 소치가 아니라 그러한 전력투구의 노력이 스스로 얻어낸 결과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지 않으면 안된다. 재능으로 치면 겨우 말 한마디를 찾기 위해 하루 종일 뇌수를 짜내는 그의 경우는 오히려 둔재 중의 둔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또 처음부터 대작가 대시인으로 태어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문학의 수많은 기라성들은 모두가 처음부터 대작가 대시 인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플로베르가 예시하는 바와 같은 노력을 통 해 자기 자신을 그렇게 만들어간 사람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마음먹고 한번 시에 도전해 볼 만한 일이 아닌가..

  그래도 재능이 아주 없고서야 곤란하지 않겠느냐는 말은 물론 수긍에 값한다. 그러나 시를 지망하는 사람들은 그렇게까지는 걱정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시를 좋아해서 자발적으로 시를 선택한 사람들이 기 때문이다. 시를 좋아하는 그 마음 속엔 반드시 시에 대한 재능이 잠 재해 있다. 무슨 일이든 그 일을 좋아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그 일에 대 해 잠재적 재능을 가졌다는 뚜렷한 징표인 것이다. 바둑을 좋아하는 사 람만이 기사가 될 수 있고 수영을 좋아하는 사람만이 다이빙선수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시의 지망자들이 걱정해야 할 것은 재능의 유무가 아니다. 문제는 재능이 아니라 자기 속에 이미 잠재해 있는 재능을 자 기가 얼마만큼 열심히 키워갈 수 있느냐 하는 그 노력의 의지인 것이다. [천재는 1%의 재능과 99%의 노력의 소산이다]라고 발명왕 에디슨 (Tomas A. Edison)은 말했다. 시에 관한 1%의 재능은 그것을 쓰는 능력 이 그 존재의 한 특질로 되어 있는 인간의 기본자질이라 할 수 있다. 시 를 좋아해서 자기도 직접 시를 써보겠다고 나선 사람들에게는 그 1%의 기본자질 외에 더 많은 재능이 부여되어 있다. 그 많은 재능을 살리면 된다. 노력하면 살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노력하는 사람은 남이 들려주는, 모범답안이 있을 수 없는 창작방법론도 모범답안 이상으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글도 물론 그렇게 활용되기를 바라고 있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 노력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서 시를 잘 쓰게 된다면 그것도 역시 공짜인 것이다. 자, 그럼 모두 함께, 없는 공짜는 바 라지 말고 떳떳하게 값을 치르면서 시를 써보기로 하자.


1) 그것은 곧 감정의 표현이다

서양 사람들은 옛날부터 시에 3가지 종류가 있다고 말한다. 옛날부터 그랬다고 해서 고전적 삼분법이라고 불리는 이 3가지 종류의 시는 우리 도 이미 알고 있는 서정시, 서사시, 극시이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에 따 라 그 중에서 서사시와 극시는 이름까지도 시가 아니고 소설과 희곡이 라고 바뀔 만큼 큰 변화를 겪었다. 그에 비하면 서정시는 상대적으로 변화가 덜해서 오늘날은 그것이 시라는 이름을 독점하는 형국이 되어있 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시는 서정시의 준말인 셈이다.

  서정시의 그 [서정]은 문자 그대로 감정의 표현을 뜻한다. 그러니까 시는 그 이름부터가 감정표현을 주로 하는 문학양식이란 특성을 드러내 고 있다고 하겠다. 이것은 우리가 직접 시를 읽어보고서도 얼마든지 확 인할 수 있는 특성이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한국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 민요시 <아리랑>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그것은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이 실제로 그렇게 발병이 났다 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알려주는 문장이 아니라, 떠나는 님에 대한 야속 함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문장인 것이다. 그 야속함 속에는 님에 대 한 사랑과 이별의 슬픔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이와같이 야속함, 사랑, 슬픔 등으로 구체화된 감정을 정서라고 한다. 그래서 감정과 정서라는 말은 까다롭게 구분하지 않고 동의어로 쓰이는 게 통례로 되어 있다. .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으며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이 시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T.S. 엘리어트의 장시 <황무지> 의 서두 부분이다. 엘리어트는 주지주의라 해서 지성을 존중하고 감정 은 되도록 억제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던 시인이다. 그러한 엘리어트 의 이 시도 그러나 그 첫줄부터 뚜렷하게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4월 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말은 4월에 대한 객관적 진술이 아니라 시안 에서 말하는 화자의 주관적 감정반응 인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흔히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다..

  감정은 인간의 의식의 한 양상이다. 인간의 의식 속에는 사물에 대해 감정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 즉 감정이 있다. 이 감정과 함께 사물 을 논리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이성을 아울러 갖추고 있는 것이 인간의 의식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감성을 통해 느끼고 이성을 통해 생각한다 고 말할 수 있다. 그 느낌이나 생각의 결과로써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이 대상에 대한 어떤 종류의 이해이다. 그러나 그 이해의 방법과 내용은 감성과 이성이 서로 큰 차이를 보인다. 먼저 이성의 경우를 보면 그것 이 우리를 이끌어가는 곳은 대상에 대한 분석적 객관적 이해의 세계이다. 객관적인 만큼 그것은 또 다른 사람들도 전적으로 그에 동의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갖게 된다. 예를 들면 그것은 물이라는 대상을 [두 개의 수소와 하나의 산소가 화합하여 이루어진 물질]이라고 이해하는 경우와 같은 것이다. 현대의 눈부신 과학문명이 사물을 그와 같이 이해하는 이 성의 소산임은 새삼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고 그러한 이성적 이해는 더불어 사는 존재인 인간의 원만한 공동생활을 가능케 하는 필수 절대 의 조건이 된다. 왜냐하면 어떤 사물을 두고 갑은 그것을 꽃이라 하고 을은 그것을 돌이라 하듯 주관적 이해가 서로 엇갈린다면 인간의 공동 생활은 유지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성은 인간이 가진 가장 귀중한 능력이란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이성만이 옳고 감성과 감정은 최대한 억눌러야 할 부정적 요소라는 인식도 은연중에 용인되고 있는 실정이다.

2) 마음의 거울에 비친 세계를 그리는 것

그러나 이성의 가치를 아무리 높이 평가한다 해도 이성만으로는 인간 의 삶이 온전하게 영위되지 못한다. 그것은 이성과 함께 감성을 타고난 인간의 숙명이다. 게다가 인간은 더불어 사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각자 가 다른 사람과는 구별되는 특수한 개별성을 가진 존재이기도 한 것이 다. 사물에 대한 감성적 이해, 즉 느낌은 그러한 개별성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것은 이성의 경우와는 전혀 다른 주관적 직관적 이해인 것이 다. 동일한 대상을 놓고도 그에 대한 느낌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사실이 그러한 감성적 이해의 실상을 말해준다..

  이러한 감성과 또 그것이 빚어내는 감정을 배척하고 만사를 이성적으 로만 생각하고 처리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 것인가. 그때의 인생은 마 치 기계가 돌아가듯 정확할지는 몰라도 차갑고 삭막하기 이를데 없는 움직임의 연속이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 당연한 귀결로서 그때는 또 사랑이나 동정심 같은 귀중한 덕목도 헌신짝처럼 저버림을 당할밖에 없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이기를 그치고 정교한 로봇이 되어 살아가는 세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모골이 송연한 일 아닌가. 여기 서 우리는 감성과 감정이 이성 못지 않게 귀중하다는 사실, 그리고 특 히 감정이 인간을 인간으로 있게 하는 핵심적 요소라는 사실을 알게 된 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도 감정표출이 자유로운 사람 을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는 인간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이성만을 내세우는 사람은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울 나지 않는 차가운 인간이라는 경원을 당한다..

  실상 감정은 이성과 대비되는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근본에 있어서는 그 속에 이성도 포괄하는 종합적 능력이다. 비단 이성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 사람이 자란 환경, 받은 교육, 읽은 책, 만난 사람, 그리고 현재 의 정신적 조건 등 말하자면 여태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축적한 경험의 총체가 감성의 작용인 우리의 느낌, 즉 감정 속에 용해되어 있다. 그러 한 경험의 총체가 하나의 육체를 빌어 구체적 인격을 이루게 된 것이 바로 인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감정은 그 사람의 인간적 조건 전부를 반영하는 종합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시는 이러한 인간의 감정을 주 로 표현하는 문학 양식이다. 그러니까 시는 그 감정 속에 용해된 우리 의 인간적 조건 전부를 통해 사물의 세계를 바라보고 그리하여 그것을 표현한 것이라는 대답이 나오게 된다. 다시 말하면 시는 사물과  세계를 가장 인간적인 눈으로 조명하고 이해한 결과인 것이다..

  이 경우 눈이란 두말할 것도 없이 마음의 눈을 뜻한다. 그리고 마음 은 그것이 바로 그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감성과 또 그 감 성의 작용의 결과인 감정과 본질적으로 통하는 의식세계이다. 왜냐하면 마음은 앞서 말한 바 감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경험의 총체가 그 속에 용해되어 있는 통합된 의식이요, 또 인간의 개별성을 나타내는 의식이 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 마음을 통해 느끼기도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 느낌, 그 생각이 하나로 어울려 있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다. 이성만 가지고는 결코 마음의 이 통합성을 이루어내지 못한다. 감성은 그와는 달리 처음부터 그 속에 이성을 포괄하는 종합적 능력이기 때문에 그 자 체가 이미 마음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가 감정을 표현한다는 말은 곧 우리의 마음에 비친 세계를 표현한다는 뜻에 다름 아닌 것이다.

3) '가치있는' 감정을 표현해야

{논어}의 양화편(陽貨篇)에 보면 공자가 아들 백어(伯魚)에게 [시를 배우지 않으면 그 사람은 마치 담벽을 보고 마주 선 것과 같다]고 말했 다는 구절이 나온다. 담벽을 보고 마주 선다는 것은 융통성 없는 답답 한 삶이 됨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물론 감정이 메마르고 따라 서 그 마음이 또한 볼품없이 막혀 있는 사람이 아닐 수 없다. 돈만 아는 사람, 권세만 추구하는 사람, 자기 일신의 동물적 욕망에만 사로잡혀 우 주와 인생의 그 도처에 편만해 있는 무수한 다른 가치에 대해서 소경이 되어 있는 사람은 손쉽게 들 수 있는 그런 예가 될 것이다. 시와 감정, 그리고 시와 마음의 상관관계를 공자는 우리에게 다시금 일깨워 주고 있다..

  그러나 시가 감정을 표현한다는 말은 오직 감정 그것만을 표현한다는 뜻이 아니다. 감정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저속하거나 무가치한 감정 은 배제하고 의미있는 감정, 가치있는 감정을 표현해야 할 것이다. 그러 자면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차원높은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철학적 명상 과 지적사고(知的思考)를 쌓지 않으면 안 된다. 뿐만 아니라 표현의 효 과를 드높이기 위한 기술적 고려는 오히려 우리에게 감정의 억제를 요 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우리는 또 시대의 발달이 인간에게 더 많은 지적 활동을 촉구하고 있다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지적 사고가 일찍 이 유례를 볼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현대인 의 정신상황이다. 시라는 이름의 마음의 거울이 이러한 우리 시대의 현 실적인 인간의 삶을 도외시한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우주와 인생 그 모두를 마음의 눈, 즉 가장 인간적인 눈으로 비쳐내는 것이 시인인 것 이다. 그때의 그 마음 속에는 물론 시대가 요구하는 현저하게 증대된 지적 사고도 용해되어 있다. 시는 감정표현을 내용의 기본특성으로 하 되, 사물과 세계에 대한 지적 분석과 비판정신도 아울러 수용하는 문학 양식인 것이다..

  이상은 시  창작의 실제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말하자면 시의 원 리에 대한 설명이다. 그러나 시가 무엇을 표현하는가라는 이 정도의 원 리는 앞으로 시를 쓰려는 사람들이 일단 알아둘 필요가 있는 기본적 이 해사항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

1) 감수성을 기르는 방법

사물에 대한 인간의 감정반응은 다양하다. 그러니까 감정을 주된 표 현대상으로 하고 있는 시는 얼마든지 다양한 내용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다. 시가 될 수 있는 감정과 그렇지 않은 감정이 처음부터 따로 구분되 어 있는 것이 아님은 이 경우 당연한 사리의 귀결이 아닐 수 없다. 예를 들어 말하면 사랑의 감정만이 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사 랑과의 대립적 성격을 갖는 미움이나 분노의 감정 역시 좋은 시를 이룰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종류를 가리지 않는 감정도 그것이 우러났다고 해서 그대로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의도적인 표현행위를 통해서만 비 로소 한 편의 시가 태어난다. 이때의 표현행위는 물론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자발적 의사에 따라 수행되는 것이다. 그러므 로 시를 쓰기 위해서는 우리의 자발적 의사, 즉 시를 쓰고자 하는 의욕 을 촉발하는 계기가 우리의 마음 속에 먼저 생겨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일종의 심리적 충격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것은 한번 시로 표현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하는, 그러니까 자 기로서는 결코 범상하게 흘려버릴 수 없는 인상적인 느낌인 것이다. 인간의 삶은 끊임없이 무수한 느낌을 쌓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느낌을 바탕으로 해서 사고가 형성된다. 그러나 그 느낌의 결과가 모두 마음 속에 뚜렷한 인상으로 새겨진다고 할 수는 없고, 오히려 대부분은 순간적으로 사라져 버린다. 아니 사실은 뭔가를 느꼈다는 자각조차 갖 지 못한 상태에서 대부분의 느낌들은 그냥 잋혀져 버리는 것이다. 이것 은 우리의 느끼는 능력, 즉 감성이 그만큼 둔화되었음을 뜻하는 현상이 다. 그리고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매일같이 거의 비슷한 경험을 되풀이 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또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매일같이 만나 는 똑같은 얼굴, 매일같이 거니는 똑같은 거리, 매일같이 받는 똑같은 메뉴의 밥상에 그때마다 인상적인 느낌을 받는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할 일이 아닌가..

  그러나 이러한 우리도 평소와는 다른 특별한 일이나 어떤 극적 사건 을 경험하면 거기서 강한 충격을 받게 된다. 강한 충격이란 마음 속에 뚜렷한 자취를 남기는 느낌이다. 그리고 시를 쓰려는 사람에겐 앞에서 말한대로 그러한 느낌이 표현의 의욕을 불러 일으키는 계기가 될 수 있 다. 그러니까 시를 쓰려는 사람은 평소와는 다른 특별한 일이나 극적 사건을 자주 경험할수록 좋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외형으로 보아서 누구나 그것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특별한 일이나 극적 사건은 자주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1년에 한 두번 겪을까 말까 한 그런 일을 기다려 시를 쓴다는 것은 시 쓰기를 사실상 포기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리고 남보기엔 유별난 경험도 그것이 반드시 그 당자에게 강한 충격을 준다는 보장이 또한 없다. 어떤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일에서도 다른 어떤 사람은 강한 충격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객관적 현상으로서 경험대상이 아니라 경험 주체인 우리들 자신의 감수성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감수성이 잘 발달해서 그것이 남보다 예민하고 또 유연한 사람은 시를 쓸 수 있는 계기를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2) 동심적 발상법 보기

그렇다면 감수성을 어떻게 발달시키느냐는 문제가 먼저 선행적인 과 제로서 우리 앞에 떠오르게 된다. 감수성은 타고나는 일면이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인위적으로 발달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냐는 말도 나올 수 있다. 그러나 후천적 노력이 완전히 배제되는 것이다. 더구나 시를 좋아하는 사람의 경우는 당자의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훌륭한 수준으로 향상될 수 있는 것이 감수성이다. 문제는 그러한 노력의 방법이 무엇이냐 하는 데 있다..

  그 방법의 핵심이 되는 것은 어떤 사물, 어떤 현상도 그것을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상식이나 고정관념의 잣대로 재단하지 말고 난생처음 보듯 바라보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태도를 뒷받침 하는 것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라 할 수 있다. 어린아이는 웬만한 일이 모두 처음 보고 겪는 일이기 때문에 신선하고 신기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 신선하고 신기한 느낌. 그것은 그 대로 우리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시를 쓰는 계기가 될 수 있는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예부터 사람 들이 詩心(시심)은 童心(동심)이라고 일러오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오리 모가지는

호수를 감는다.

오리 모가지는

자꾸 간지러워.

  이것은 정지용의 <호수 2>라는 시의 전문이다. 호수라기 보다는 좀 큰 연못에 오리가 떠 있는 정경을 이 시는 묘사하고 있다. 수면 위에 목 만 내놓고 마치 미끄러지듯 헤엄쳐 가는 오리가 때때로 그 목을 홰홰 돌리곤 하는 것은 우리가 그동안 한두 번 아니게 보아온 일이다. 이 시 의 첫 연은 그러한 오리의 동작을 [호수를 감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둘째 연은 그 이유를 밝힌다. 오리가 목에 호수를 감는 것은 목 이 자꾸만 간지럽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호수에 떠 있는 오리의 목돌림을 목이 간지러워 호수를 그 목에 감는 동작으로 인식한 그 발상법은 그야말로 동심에서 우러난 것이 아닐 수 없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 시 를 좋게 볼 수도 있고 나쁘게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평가 여하를 막 론하고 이 시가 동심으로 통하는 마음의 소산이란 사실만은 누구도 부 인할 수 없는 것이다.

나의 귀는 소라껍질

바다 물결소리를 그리워한다.

   쟝 콕토(J. Cocteau)의 널리 알려진 이 짧은 시 <귀>도 동심적 발상법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좋은 예의 하나가 된다. 그리고 보니 아닌게 아니라 소라껍질 같기도 한 귀의 모양을 그러나 정작 소라껍질이라고 서슴없이 표현한다는 것은 천진무구한 동심적 발상법이 아니고는 해낼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인식된 귀가 바다 물결소리를 그리워하는 것은 역시 그 동심적 발상법에 따르는 자연스런 연상이 아닐 수 없다. 일상적 삶에 젖어있는 삶들은 무심하게 보아 넘기기 일쑤인 호수의 오 리와 자기 귀를 이와같이 한 편의 시로 탈바꿈시킬수 있는 힘을 가진 것이 동심인 것이다.

3) 상상력과 낯설게 하기

그러나 이 동심이란 말을 너무 고지식하게 받아들이면 어린이를 대상 으로 하는 동요나 동시가 시의 이상형이 된다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우 려가 있다. 동요나 동시도 물론 훌륭한 시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대하고 있는 시는 그 모두가 동요나 동시처럼 씌어만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그래서도 안 되는 것이다. 동심적 차원의 사고로서는 쓸 수도 없고 이해도 할 수 없는 심오한 내용을 가진 시들, 그리고 또 그로 해서 높이 평가되는 시들이 현실적으로는 오히려 훨씬 많은 수를 헤아린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行人)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오시면, 나는 바람에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느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위에 인용한 것은 만해 한용운의 시 <나룻배와 행인>의 전문이다. 그 리고 이 시는 여러 분석자들로부터 불교의 보살정신이라는 동심적 차원 의 사고로써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상적 내용을 갖는다는 말을 듣 고 있다. 그말이 옳든 그르든간에 이 시는 앞에 인용한 정지용의 <호수  2>나 쟝 콕토의 <귀>와 비교할 때 그것들이 아주 두드러지게 동심(으 로 통하는 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과는 달리 곰곰 새겨야만 이해할 수 있는 그 어떤 사상적 내용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동 심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밖에 없는 이 시도 그러나 표현의 세부를 살펴보면 반드시 그렇게만 말하기 어려운 흥미있는 현상을 발견하게 된 다.

  그 좋은 예가 되는 것은 시 속의 화자가 자기를 [나룻배]로 비유하고 있는 대목이다. 실제로는 결코 나룻배일 수 없는 인간이 이처럼 나룻배 로 변용된 것은 시인의 그 마음의 눈이 대상을 상식이나 고정관념의 틀 로부터 해방시켜 새롭고 신선하게 바라본 결과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무슨 일이든 난생 처음 보듯 신선하고 신기하게 바라볼 수 있는 어린아 이와 같은 마음이 그런 눈을 갖게 한다는 것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 다. 그러한 마음을 바탕으로 해서 불교의 보살정신이라고 요약할 수 있 는 사상과 철학을 시적으로 형상화한 것이 만해의 <나룻배와 행인>인 것이다.

  내용이 이와는 다른 시, 이를테면 뜨거운 분노나 예리한 비판이나 또 인간의 고독과 고민을 표현하고 있는 시도 물론 많다. 그 러나 그 어떤 시도 사물이나 대상을 그리고 그것들의 총체인 세계를 상식과 고정관념 의 틀로부터 해방시켜 마치 어린아이가 그러하듯 새롭게 바라보고 있다 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그래서 편의상 동심적 발상법이라 했지만 단순 한 동심 그것만으로는 아무래도 역시 모자람이 많이 남는 시를 쓰는 그 마음을 폴 발레리(Paul Valery)는 [우주적 감각]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 주적 감각이란 뭐 달이나 별을 바라볼 때와 같은 느낌이 아니라 현실적 이해(利害)를 초월한 의식으로 사물을 관조(觀照)할 때 얻게 되는 느낌 을 발레리는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때는 사물이 우주적 질서를 구현한 것이라 할 수 있는 본질을 드러낸다는 생각이 [우주적 감각]이란 말의 배경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물론 깊이 새겨 볼 만한 말이지만 그러나 이제부터 시를 써보 려는 사람에게는 좀 어려운 느낌이 있다. 그래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다른 말을 빌려오면 [낯설게 하기]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러시아 형식 주의자라고 일컬어지는 일군의 문학이론가들이 시의 기능을 [사물의 낯 설게 하기]라고 규정한 데서 따온 말이다. [사람]을 그냥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낯선 것이 아니라 낯익은 인식이다. 그러나 [사람]을 [나 룻배]라 한다면 그것은 분명 낯선 인식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낯선 그만큼 새로운 인식이기도 한 것이다. 오리의 고개저음을 목이 간 지러워 호수를 그 목에 감는 동작으로 본 정지용의 경우나 귀를 소라껍 질로 본 콕 토의 경우는 모두 그렇게 낯설고 그렇게 새로운 인식의 좋은 예가 된다고 하겠다. 영국의 작가 체스터톤(G.K. Chesterton)은 거리의 가 로수를 두고 [그것은 노상 누워만 있는 땅의 일부가 그 지루함을 견디 다 못해 어느날 벌떡 일어선 모습]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 가로수에 대 한 그야말로 낯설고 새로운 인식이다.

  위에 든 몇가지 예를 통해 이미 짐작한 바 있겠지만 사물을 낯설게 만든 그 새로운 인식은 언제나 그 대상을 실제로는 그렇게 있지 않은 다른 무엇으로 변용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사람이 [나룻배], 귀는 [소라 껍질]이 된 것이다. 이러한 변용은 두말할 것도 없이 상상력의 소산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사물을 낯설고 새롭게 인식한다는 것은 상상력 을 통해 그것을 바라본다는 뜻에 다름 아닌 것이다. <악의 꽃>의 시인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는 상상력을 [인간이 가진 여러 능력의 여왕 이며 세계 또한 그 힘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많은 해설을 붙여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말이지만 지금은 그럴 겨를이 없다. 그러나 보들레르의 참뜻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상상력이 무엇인가를 새로 만드는 창조의 원동력이라는 사실은 이미 널리 수용되고 있는 상식이다. 그리고 시는 예부터 값진 창조행위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시를 쓰는데 있어 기본이 되는 마음의 바탕은 바로 그 상상력을 통해 사물과 세계를 바라보는 자세라고 규정될 수 있는 것이다. 상상력은 언제나 인간의 감정과 더불어 작용된다.

  사랑의 감정에 젖어 있는 사람은 우연히 눈에 띤 꽃 한 송이를 사랑 하는 그 사람의 얼굴로 보게 되고 또 슬픔에 잠겨 있는 사람은 반대로 그 꽃을 슬픔의 표상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의 경우는 그 상상력이 거의 천방지축이라 할 만큼 자유자재로 날개를 펴고 있다. 그 리고 상상력을 위축시키는 것은 [우주적 감각]을 마비시키는 현실적 이 해의식과 상식과 고정관념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동심]과 [우주적 감각]과 [낯설게 하기]와 그리고 시의 주된 표현대상인 [감정]이 모두 상상력으로 수렴되는 것들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그 상상력이 풍부 한 사람은 사소한 일에서도 신선한 충격을 받곤 하기 때문에 시를 쓸 수 있는 계기 역시 남보다 많이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

 

4) 상상력을 키우는 훈련

시를 쓰는 마음은 사물을 관조하고 그리하여 그것을 상상적으로 변용 시키게 된다는 것이 앞장에서 살펴 본 요지이다. 상상력은 사물을 상식 이란 이름의 인습의 거울에 비친 대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거부하 는 태도로 그러니까 여태까지와는 달리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힘이다. 여태까지와는 다른 만큼 그렇게 새로워진 사물은 이미 낯설게 변용되어 있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인습의 겨울에 비친 대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을 지각(知覺)의 자동화 (自動化)현상이라 한다. 이를테면 우리는 여기 있는 이 볼펜이나 저기 있는 저 소나무를 특별한 의식적 노력없이 대뜸 조건반사적으로 볼펜 또는 소나무라고 알아본다. 그것은 오랜 인습이 길러낸, 자동화된 지각 의 소산이다. 이러한 지각의 자동화 현상은 우리의 일상생활 구석구석 에 참으로 넓고 깊게 퍼져 있다. 일상 생활을 지배하는 원리, 그것이 바 로 지각의 자동화인 것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인간의 삶은 편리하게 영위되어 나간다. 만일 우리가 이 볼펜이나 저 소나무를 자동적으로 그 렇게 지각하지 않고 도대체 이것이 무엇인가를 일일이 생각한 다음 그 렇게 알아보게 된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 것인가? 그것은 단순히 불편 하다는 정도가 아니라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파괴해 버리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그런 뜻에서 지각의 자동화는 인간의 삶이 현재의 모양대로 존속될 수 있도록 지탱해주는 긍정적 원리라고 규정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 측면 때문에 우리가 모든 사물을 오직 자동화 된 지각의 그 인습적 시각으로만 바라보게 된다면 우리의 삶과 세계는 언제나 과거를 되풀이할 뿐 진보나 발전으로 통하는 새로움은 성취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의 삶은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수많은 사물과의 교 섭과정이다. 사물을 새롭게 바라본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그 사물과 의 새로운 교섭, 즉 새로운 삶을 뜻한다. 새로운 삶이란 창조적 내포를 갖는 삶이다. 그리고 우리들 개개인의 삶이 새로운 창조성을 획득해 나 간다면 인류 전체의 문화와 역사도 그에 비례하는 발전을 이룩하게 된 다. 그러므로 시가 그 첫걸음에서부터 우리에게 요구하는 지각의 자동 화를 거부하는 상상적 시각은 개인의 삶뿐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문 화와 역사를 창조하는 핵심요인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자동화된 지각의 안경을 벗고, 그러니까 상상력을 통해 사물을 바라 보면 여태까지는 보이지 않던 그 사물의 새로운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다시 이 볼펜을 예로 들면 자동화된 지각이 보여주고 있는 그 모습은 필기도구에 불가한 것이지만, 상상력이 거기에 작용할 경우에는 그것이 어떤 여자에 대한 나의 사랑의 구체적 표상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나는 이 볼펜으로 곧잘 그 여자에게 절절한 사랑의 편지를 쓰곤하기 때 문이다. 이와같이 사랑의 표상으로 바뀐 볼펜은 여태까지의 일상적 관 점에서는 전혀 밖으로 드러나지 않던 새로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새 로운 그만큼 낯선 모습이다. 그러므로 지각의 자동화를 거부하는 상상 적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본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말과 같 은 뜻이 되는 것이다.

시인은 이글이글 타는 눈알을 굴리며 하늘위 땅밑을 굽어보고 쳐다보아 상상력이 알지 못하는 사물들의 모양을 드러내면, 시인의 붓은 그에 따라 공허한 것에 육체를 주고 장소와 이름을 정해 준다.

 위에 인용한 것은 셰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에 나오는 한 대목이 다. 그리고 거기에는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양을 드러내는] 상상력 의 기능이 분명하게 밝혀져 있다. 알지 못하는 사물들이 모양을 드러낸 다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게 됨을 뜻하는 것이다. 지난 날 영국이 식민지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했다는 대시인 셰익스피어에 게 있어서도 이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그 상상력은 시의 핵심요건 으로 인식되고 있다.

5) 사물을 보는 시각의 차이 : 그 아홉 가지 유형

그러면 여기서 우리들 자신은 사물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반성적으로 점검해보자. 지금 우리 앞엔 나무 한 그루 서 있다고 가정한다. 그 나무 를 바라보는 시각은 물론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그 차이를 단계화해서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은 유형이 나올 수 있다.

  

1. 나무를 그냥 나무로 본다.

2. 나무의 종류와 모양을 본다..

3. 나무가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가를 본다..

4. 나무의 잎사귀들이 움직이는 모양을 세밀하게 살펴본다..

5. 나무 속에 승화되어 있는 생명력을 본다..

6. 나무의 모양과 생명력의 상관관계를 본다..

7. 나무의 생명력이 뜻하는 그 의미와 사상을 읽어본다..

8. 나무를 통해 나무 그늘에 쉬고간 사람들을 본다..

9. 나무를 매개로 하여 나무 저쪽에 있는 세계를 본다..

 

 위에 든 아홉가지 유형 중에서 당신의 경우는 어느 단계에 속하고 있 는가? ①에서 ④까지는 나무의 외형적 관찰이지만, 일상적 상식적 차원 에 있어서의 우리는 그나마도 ①과 ②정도의 눈으로 나무를 보고 있다. ③과 ④는 그보다 한걸음 앞선 태도이긴 하지만 역시 나무의 외형적 관 찰이며, 따라서 그다지 깊이있는 관찰이라 할 수가 없다. ⑤에서 ⑦까지 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나무의 외형이 아니라 그 내면을 바라보는 시 각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일상적 상식적 차원에서 보이지 않는 나무의 모습 이 우리 앞에 드러난다. 나무의 생명력이라든지 또 그 생명력의 의미나 사상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 대상인 것이다. 한데도 이 단계에서는 그 것들이 모두 나무의 모양으로 형상을 얻고 있다. 그리하여 생명력이나 사상으로 바뀌어진 나무의 그 변용은 물론 상상력의 소산이 아닐 수 없 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러한 나무는 그 의미의 측면에 있어서도 깊이있는 내용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과  의 단계에 이르면 나무는 다시금 비약적 변용을 이루게 된다.  ∼ 의 단계에 있어서는 그래도 아직 지금 서 있는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던 나무가 이번에는 자리까지 옮기게 되는 것이다. [나무 그늘에 쉬고간 사람들]을 보게 될 때의 나무는 지금의 그 자리에 있지 않고 이 미 다른 자리에 서 있다. 그곳은 그렇게 쉬고간 사람들이 쉬는 그동안 에 이런 일 저런 일을 생각해 본 인생의 갖가지 사연이 얽혀 있는 자리 인 것이다. [나무를 매개로 하여 나무 저쪽에 있는 세계]를 보는  의 단계도 나무가 보다 발전적자리로 옮긴 경우임이 분명하다. 연장선을 그어 확대시키면 인생 만사와 우주의 삼라만상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것이 [나무 저쪽에 있는 세계]인 것이다. 한 그루의 나무를 통해 이처 럼 광대한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놀라운 기적이 아 닐 수 없다. 그 기적을 낳는 원동력이 상상력이다. 그리고 시인은 그 상 상력을 누구보다도 많이 가진 사람이다.

  시인이 아니라도 이 상상력은 사람들에게 인류 전체의 문화와 역사를 변혁시킬 만큼 엄청난 발견을 할 수 있게 해준다. 발견이란 여태까지는 보이지 않던 것을 본다는 뜻에 다름아닌 것이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한 아이작 뉴튼의 경우는 시인 아닌 사람의 상상 력이 이룩한 두드러진 업적의 하나가 된다. 만류인력은 사과의 낙하라 는 현상 저쪽에 보이지 않는 세계인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앞에 든  의 단계, 즉 나무를 그냥 나무로 보 듯 무심코 지나쳐 버렸지만 뉴튼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사과의 낙하현 상을 낙하현상 그대로만 바라보지 않고 변용시켜 보았기 때문에 만유인 력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한 변용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 상상력이라는 사실은 구태여 두말할 나위가 없다. 다시 셰익스피어의 시구절을 빌면 만유인력과 또 그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우주의 어떤 차원의 질서는 [상 상력이 알지 못하는 사물들의 모양을 드러내] 우리 앞에 보여준 결과의 하나인  것이다. 그런 뜻에서 아이작 뉴튼은 직접 시를 쓰진 않았어도 풍부한 시적 능력을 소유한 인물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6) 상상력은 사물에 새로운 의미의 지평을 열어준다 나무같이 예쁜 시를/나는 다시 못보리.//대지의 단 젖줄에/주린 입을 꼭 댄 나무.//종일토록 하느님을 보며/무성한 팔을 들어비는 나무.//여 름이 되면 머리털 속에/지경새 보금자리를 이는 나무.//가슴에는 눈이 쌓이고/비와 정답게 사는 나무//시는 나같은 바보가 써도/나무는 하느 님만이 만드시나니.

 이것은 미국 시인 A. 킬머(Alfred J. Kilmer)의 널리 알려진 <나무>라는 시의 전문이다. 이왕 나무 이야기가 나왔으니, 실제로 나무가 시인에 의 해 어떻게 변용되고 있는가를 알아보자는 뜻에서 이 시를 인용해 보았 다. 미상불 시인의 상상력은 이 시에서 나무를 여러 가지 새로운 모양 으로 변용시켜 놓고 있다. 1연에서는 [시], 2연에서는 [대지의 젖줄에 입을 대고 빨고 있는 아이], 3연에서는 [팔을 들어 기도하고 있는 사람] 등으로 바뀌어져 있는 것이 이 시에 나타난 나무의 모습이다.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이러한 나무의 변용이 다만 현상을 바꾸어 놓는데 그치지 않고 역시 그 변용에 상응하는 어떤 의미를 제시 하고 있다는 점이다. 편의상 우리는 그 의미를 [신의 섭리에 순응하는 삶의 아름다움]이라고 요약해 볼 수 있다. 편의상의 요약인 만큼 이것 은 물론 이것만이 옳다고 고집할 수 없는 해석이다. 그러나 그 래서 다 른 해석을 취한다 하더라도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사실 자체는 부 인하지 못한다. 의미를 뒷받침하는 것은 철학이다. 그러므로 시인의, 아 니 인간의 상상력 속에는 의미와 철학으로 통하는 요소도 이미 내포되 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같이 상상력은 단순히 사실 아닌 허 구를 만들어내는 힘이 아니라 사물에 새로운 의미의 지평을 열어주는 능력이기도 한 것이다.

  사물은 비록 하찮은 것이라도 그 자체로 고립되어 있는 것이 없다. 이를 테면 이 볼펜도 플라스틱과 종이와 문자 등 다른 사물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그리고 예시한 플라스틱과 종이와 문자 역시 수많은 다른 사물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유지하고 있 다. 그리하여 끝없이 확대되는 사물 상호 관계의 그물이 세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상력이 사물에 새로운 의미의 지평을 열어준 다는 말은 필경 세계의 의미를 새롭게 창조한다는 뜻으로 발전하게 되 는 것이다.

  이러한 상상력은 비록 동일한 대상이라 할지라도 그에 대한 작용의 결과가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그것은 상상력이 우리들 각자의 개 성과 밀착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현상이다. 그리고 상상력은 또 언제나 대상을 종합적, 직관적으로 파악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사랑하 는 사람을 [당신은 나의 별]이라고 상상적으로 변용시킬 수 있는데, 이 때의 이 [당신]의 변용은 분석적 관찰의 결과가 아니라 종합적 직관의 결과인 것 이다. 보다 쉽게 말하면 [당신]이란 대상을 한눈에 [별]로 바 꾸어 놓는 것이 우리의 상상력인 것이다.

  과학적인 눈으로만 본다면 사람인 [당신]이 [별]로 바뀌는 것은 터 무니없는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 변용 속에는 과학과 이성이 도저히 그에 미칠 수 없는 인간의 마음이, 그것도 아주 진실된 마음이 투영되 어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진실된 마음이 없고서야 어찌 상대를 [당신 은 나의 별]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사물을 상상적으로 본다는 것은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과 다름없는 일임을 우리는 여기서 다시금 확인 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상상력은 앞에서 말한 대로 개성을 표현하게 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개성의 테두리 안에서만 우리를 가두어 놓는 것이 아니다. [당 신]을 [별]로 바꾸어 놓은 것은 [이것]을 [저것]으로, 따라서 [다른 사 람의 일]을 [내 일]로 바꾸어 놓는 것과 같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개 성은 다른 사람의 세계로 확산되어 공감을 불러오게 되는 것이다. 독특 한 개성의 표현물이면서도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시의 그 오묘 한 힘은 그러므로 상상력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시를 쓰려는 사람은 물론 이러한 상상력을 키우지 않으면 안 된다. 훈련하면 키울 수 있는 것이 상상력이다. 앞에 든 나무를 바라보는 아 홉 가지 시각은 상상력을 키우는 훈련의 한 모델이 될 수 있다. 나무 뿐 아니라 모든 사물을 외형적으로만 바라보지 말고 최소한  에서  까지 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훈련을 쌓으면 상상력을 키우는 데 있어 큰 도움 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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