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굽이치는 물길 감싸안은 ‘푸근한 산세’ 영동

대구해송 2016. 9. 11. 22:35
충북 영동 황간면의 월류봉은 ‘달이 머물다 갈 정도로 아름다운 봉우리’란 의미를 갖고 있다. 깎아지른 듯한 암봉이 이어지고, 초강천으로 내리꽂은 산줄기 위에는 정자 월류정이 놓여 있다. 월류정이 있는 절벽을 중심으로 물길이 굽이쳐 화려한 풍경을 자아낸다.

충북 영동의 황간면은 아담한 시골마을이다. 시골이면 떠오르는 작은 기차역이 여행객을 반긴다. 마치 고향을 찾은 것처럼 말이다. 여기에 금강의 지류인 초강천을 따라 월류봉이 수려한 풍경을 자랑하고 있다. 푸근함이 느껴지는 황간이지만 가슴 아픈 현대사의 한 페이지도 품고 있다. 노근리 쌍굴다리다.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지나칠 수 있는 곳으로, 전쟁의 상흔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작은 마을이지만 자연 풍광과 역사의 흔적이 살아 있는 곳이다.


                                            고향과 관련된 시로 꾸민 충북 영동 황간역.


◆ 정겨운 고향역 모습 그대로

‘고향길 가는 날은 완행 열차를 타고 가자 / 중간역 간이역들 잘 있었나 인사하며 / 늘어진 강물도 데불고 세월 저편 찾아가자’(고향 가는 길, 정완영)

군데군데 놓인 항아리에 ‘고향’, ‘외갓집’, ‘귀가’, ‘쟁기’ 등 향수를 자극하는 제목의 시들이 적혀 있다.

작은 시골역이지만 입구부터 새롭다. 장승 사이로 ‘고향의 시를 담은 항아리’라는 문패가 걸려 있다. 문패를 지나 가장 먼저 맞는 시는 정지용 시인의 ‘향수’다.

역사는 시골역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에 걸맞게 ‘황간역’이라 적힌 간판 하나에 작은 출입구 하나가 전부다. 하루에 서는 기차는 무궁화호 10여편뿐이다.



역 안으로 들어서면 기차 행선지를 알려주는 표지가 걸려 있다. 새마을호, 무궁화는 물론 통일호와 통근열차 표지 등이 옛 기차여행의 추억을 되살려준다.

이처럼 역을 꾸민 이는 강병규 역장이다. 2012년 말 부임 후 역을 문화공간으로 변신시켰다.

지역 향토작가와 유명 시인들이 쓴 시와 소설 등을 강 역장이 옹기에 직접 새겨 넣었다. 시뿐 아니라 주말에는 향토 예술인들이 꾸미는 음악회와 시낭송 무대도 열린다.



1905년 문을 연 황간역은 한때 석탄 수송용 화물열차가 정차해 제법 큰 규모로 운영됐으나, 2000년대 이후 이용객이 급감하면서 쇠락해 폐선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강 역장의 이 같은 노력으로 황간역은 살아남았다.

역 안에는 1970년대 황간역 아침 통근시간을 배경으로 만든 작은 모형이 눈길을 끈다. 기차 타고 학교 가는 여학생과 남학생, 출근하는 남편과 젖먹이를 업고 나와 배웅하는 아내, 홍시를 광주리에 이고 가는 아줌마 등 당시 풍경을 정겹게 담아냈다.





승강장에도 항아리에 쓰인 시들이 여행객을 반긴다. 여기저기 쓰여 있는 시를 읽다 보면 멀리서 기차가 오는 소리가 들린다. 황간역에는 서지 않는 기차가 이내 시야에서 사라진다.



◆ 달도 제 모습에 반해 쉬어가는 곳

황간면에는 월류봉을 중심으로 한천팔경이 자리 잡고 있다. 월류봉은 백화산 자락에서 발원한 석천과 민주지산 물한계곡을 이루는 초강천이 만나는 지점에 있다. 깎아지른 듯한 암봉이 이어지고, 초강천으로 내리꽂은 산줄기 위에는 정자 월류정이 앉아 있다. 월류정이 놓여 있는 절벽을 중심으로 물길이 굽이친다. 월류봉은 달이 머물다 갈 정도로 아름다운 봉우리란 의미인데, 산세와 굽이치는 물길 등이 이름답게 화려한 풍경을 자아낸다.




월류봉 주변에는 우암 송시열 선생의 흔적인 한천정사와 송시열 유허비가 남아 있다. 한천정사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은거할 당시 학문을 닦고 후학을 길렀던 곳이다. 이러한 내용을 알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 바로 송시열 유허비다. 한천팔경도 한천정사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월류봉은 보는 것 외에도 산행코스로도 좋다. 우천리에서 시작해 상봉, 평봉, 월류봉을 거쳐 원촌리로 하산하는 코스인데 4시간 정도 걸린다. 월류봉에 오르면 원촌리 마을을 조망할 수 있는데 초강천이 감싸고 있는 지형이 한반도 지도와 비슷해 유명세를 타고 있다.



◆현대사의 굴곡진 한 페이지

그해 여름도 무더웠을 것이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7월 말이었으니.

전쟁에 참전한 미군은 대전에 패한 후 영동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에 맞춰 황간면 임계리 주민들에 대한 소계 명령도 내려졌다. 미군 지시에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던 임계리 주민들에겐 상상하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피란민들이 황간면 노근리 쌍굴다리로 불리는 개근철교 인근을 지날 때 미군 전투기가 피란민 행렬에 폭격을 가했다. 이를 피해 근처 쌍굴다리로 피란민들은 피신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쌍굴다리에 피신한 주민들에게 미군은 기관총을 무차별 난사했다. 굴 안에서 조금의 움직임이라도 있으면 총알이 날아왔다. 7월 26∼29일 나흘 밤낮에 걸쳐 이뤄진 사격으로 수백 명의 주민이 숨졌다. 죽음의 피란길이 된 것이다.

군사정권 시절엔 이런 얘기를 꺼내지도 못하다가 1999년 AP통신 보도 등으로 노근리 사건이 알려지게 됐다.

“촌에 있던 우리가 뭘 알겠어. 난리가 나 남쪽으로 피하라는 군인들 말을 따를 수밖에. 몇십 년 살던 고향을 버리고 떠났지.”


                  노근리 쌍굴다리에서 억울하게 스러진 주민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한 꽃들.


당시 10살이었던 양해찬(76)씨는 그때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양씨는 “젊은 청년들은 밤에 굴에서 빠져나가다 일부는 총에 맞고 운 좋으면 빠져나갔다”며 “나같이 어리거나 노인들은 나흘간 먹는 건 고사하고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있다 간신히 살아났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노근리 쌍굴다리엔 당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쌍굴 벽면 여기저기엔 총탄 자국이 선명하다. 총탄 자국을

표시한 흰 페인트 자국은 셀 수 없이 많다. 당시 억울하게 스러진 주민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한 꽃도 몇 송이 남아 있다. 건너편엔 노근리 평화공원이 조성돼 있다. 피란 초기부터 노근리 사건이 어떻게 알려졌는지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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