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그리움

늙어가는 아내에게 / 황지우

대구해송 2022. 11. 21. 23:40

늙어가는 아내에게 / 황지우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지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꼽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 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전,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 주었지

 

그런거야, 서로를 오래 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 알 한 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있는 만큼 그대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 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지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지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 묻힌 손으로 집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일 것이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 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