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예수

3.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

대구해송 2022. 3. 4. 23:00

3.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

 

 

어떤 그리스도인을 붙들고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라고 물으면 하나님을 믿습니다. 또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교회를 믿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당신은 왜 그리스도교를 믿습니까?」라고 질문하면, 「복을 받기 위해서 믿습니다」 「병을 고치기 위해서 믿습니다」 「죽어서 천당 가기 위해서 믿습니다」 때로는 심심해서 취미 삼아 교회에 다닌다는 사람들도 있다. 한국 교회는 이단들에게 많은 신자들이 약탈당한 쓰라린 상처를 가지고 있다. 지금 한국 교회가 세계 교회 역사 가운데, 그 예를 찾아 볼 수 없는 부흥을 하였다. 그러나 양적인 성장에 비해서 질적인 성장이 따르지 못하고 있음으로 대단히 염려하고 있다. 아직도 그 신앙적인 기초가 심히 허약하다.

 

그래서 모든 교회가 깊은 깨달음에서 출발하여 성경 공부를 많이 시키고 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평신도들이 성경을 연구하는 열기가 고조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대단히 다행한 일이다. 기독교 신앙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다. 분명한 신앙의 대상이 있고, 확실한 신앙의 내용이 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믿느냐?」 「왜 믿느냐?」라는 질문에 대해서 분명하게 대답해야 할 것이다. 무속 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처럼, 맹목적이고, 무지한 신앙인 들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그리스도교의 모든 진리를 깊이 연구해서 많이 아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그것보다도 우선 기초적인 신앙의 내용을 분명하게 알고 믿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예수님 당시부터 신앙의 내용을 분명하게 정리해 나가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였다. 예수님께서도 3년동안 제자들을 가르치신 후에 마지막 단계에 가서는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받으셨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믿느냐?」고 물으셨을 때, 제자들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하였다(마 16:16). 이러한 신앙고백 위에 그리스도교가 세워졌다. 그 이후에 초대 교회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을 때, 또한 이단의 유혹을 받을 때도 그들의 신앙 내용을 분명하게 정리하여, 고백함으로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확실히 지켜 왔다.

 

그리스 도인들이 믿는 하나님은 형상이 없으신 초월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마음으로 영접하고 의지하고 순종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이러한 마음의 태도를 믿음이라 하고, 이 믿음의 내용을 조목별로 고백해서 정리한 것을 신조(信條) 또는 신경(信經)이라고 한다.

 

그리스도 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조가 백여개 이상 되지마는 가장 오래되고 대표적인 것이 「사도신경」(사도신조)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인 사도들의 신앙 고백서라는 뜻이다. 사실은 마태복음 16장 16절의 사도들의 신앙고백을 근간으로 해서 그리스도교 교회가 2백여 년에 걸쳐서 발전시킨 것이다. 사도 신조는 그후 3세기경에 널리 사용하였는데 세례 문답때 그것으로 신앙고백을 하게 하였고 또한 이단과 박해자들에게 분명한 증거를 제시하는데 사용하였다.

 

당신이 무엇을 믿습니까? 하는 질문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은 12조항으로 된 사도신조로 자신이 믿고 있는바 신앙의 내용을 분명하게 대답했던 것이다. 신조는 후에 교리로 발전하였고, 이것을 보다 더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인간의 언어로 연구해 나간 것이 신학이다. 신학이 본격적인 학문으로 연구되어진 것은 「오리게네스」라는 교부로부터 라고 할 수 있다.

 

오리게네스는 최초로 교리 학습 학교를 세워서 교회의 신앙 훈련을 시켰다. 신학은 어디까지나 교회의 학문으로 출발하였고, 교회를 위한 학문이었다. 그러나 계몽주의 시대 이후부터는 신학이 교회를 떠나서 대학으로, 신학자들의 신학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신앙 없이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하나의 학문이 되었다고 한탄한다.

 

세계 교회는 신학이 교회의 신학으로 돌아오도록 갈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인류에게 주신 것은, 연구나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닌 줄 안다. 그 말씀을 믿고 구원받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삶의 규범으로 주신 책이다.

 

「누구를 위한 신학인가?」라는 질문에 성실히 응답해야 할 것이다. 교회 밖에서 민중 가운데 신학의 자리를 잡거나 신의 죽음까지도 거침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신학은 교회가 받아들이기 어렵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살아가도록 확실한 신앙 위에서야 할 것이다. 이일을 위해서 쉽고도 확실한 가르침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