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예수

이스라엘의 역사

대구해송 2019. 9. 29. 23:19

차례

성서 시대 

 2 성전시대 – 시온으로의 귀환 

외세의 지배 

이스라엘 국가 

평화 협상 

역사적 주요사건 



유대 민족의 발생지는 이스라엘 땅(에레츠 이스라엘)이다. 이 민족의 오랜 역사 중 상당 부 분이 이곳에서 일어났으며, 그 중 2천 년의 역사가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바로 이곳에서 이 민족의 문화적, 종교적, 국가적 정체성이 형성되었고,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그 땅에서 강 제로 쫓겨난 후에도 그들의 실제적 거주는 많은 세기 동안 유지되었다. 뿔뿔이 흩어져 있던 오랜 세월 동안에도 유대인들은 결코 이 땅과의 유대를 끊거나 잊지 않았다. 1948년에 이스 라엘이 건국됨으로써 유대인들은 2천년 전 잃었던 독립을 되찾는다.

זכור ימות עולם בינו שנות דור ודור... (דברים ל"ב ז')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신명기 32:7)



성서 시대


족장 시대

유대민족 역사는 약 4천 년 전(기원전 17세기경)에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삭 과 손자 야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기원전 2000~15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메소포타미아 발굴 문헌은 성서에 나타난 그들의 유목 생활의 단면들을 확증해준다. 창세기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여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민족을 형성하도록 부르 심을 받은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가나안 지방에 기근이 만연해지자 야곱(이스라엘)과 그 의 열 두 아들과 가족들은 이집트에 정착하, 그곳에서 그의 후손들은 노예로 전락하여 강 제 노동에 내몰리게 된다.


이집트 탈출과 정착 시대

이스라엘 민족은 4백 년의 노예 생활 만에 모세에 의해 해방된다. 성서의 이야기에 의하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모세는 자기 민족을 출애굽 시켜 그 조상들에게 약속되었던 이스라엘 땅으로 되돌아 간다(기원전 13~12세기경). 40년 간 시내 광야에서 방랑하게 되는 동안 그들은 그곳에서 한 민족을 이루게 되고 십계명을 포함하는 토라(모세오경)을 받게 되며,이것은 그들의 유일신 신앙에 형식과 내용을 부여하게 된다. 출애굽 사건(기원전1300년경)은 유대 민족의 기억에 지워질 수 없는 인상을 남겼고, 자유와 해방의 보편적인 상징이 되었다. 해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Pesach), 오순절(Shavuot), 초막절(Succot)을 지키며 그 당시의 사건들을 기념한다.

그 후 2세기 동안 이스라엘 민족은 이스라엘 땅 대부분을 정복하고 농부와 장인들이 되었으며, 어느 정도 경제적 사회적 통합을 이루게 된다. 비교적 평화로운 기간과 전쟁의 때가 반복되는 동안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사라고 불리는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규합하게 되는데 이들은 지도자적 자질뿐만 아니라 정치적 군사적 노련함을 바탕으로 선택되었다.그러나 지파 조직의 근본적인 약점은 블레셋 사람들(소아시아 출신으로 지중해 연안에 정착한 해양 민족)의 위협 앞에서 부족들을 통합하며 상속을 통해 항구적인 지위를 계승할 수 있는 통치자의 필요성을 대두시키게 된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내리시고 너를 지키시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를 베푸시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드시고 평화를 주시노라. (민수기 6:24~26)


왕국 시대

초대 왕 사울(기원전 1020년경)은 느슨한 지파 조직에서 그의 후계자 다윗의 통치 하에 완전한 왕권국가가 수립되기까지의 기간을 잇는 가교 역할을 했다.

다윗 왕(기원전 1004~965년경)은 팔레스타인 제패를 끝으로 군사 원정에 성공하고 주변 왕국들과 우호 동맹을 조직함으로써 이스라엘을 이 지역의 강대국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 결과 그의 왕권은 이집트 국경 지대와 홍해에서부터 유프라테스 강 유역까지 미치게 된다.대내적으로는 이스라엘의 12개 지파를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하고 수도 예루살렘과 군주제가 국민 생활의 중심이 되게 했다. 성서에서 다윗은 시인이자 음악가로 묘사되고 있으며, 그의 작품으로 알려진 시들이 시편(The Book of Psalms)에 등장한다.


다윗의 왕위를 계승한 그의 아들 솔로몬(기원전 965~930년경)은 국력 신장에 더욱 힘썼다.솔로몬 왕은 여러 정략 결혼으로 더욱 공고해진 이웃나라 국왕들과의 협정을 통해 이스라엘 왕국의 평화를 지키고 그 당시 열강들과 대등한 지위를 다졌다. 그는 구리 광석과 금속 제련 등 주요 사업을 육성하여 해외 교역을 확대하고 국내 경제발달을 촉진하는 한편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전략적경제적으로 중요한 기존 도시를 더욱 강화했다그의 업적 중에서도 단연 최고봉은 유대인들의 국가적종교적 삶의 중심이 된 예루살렘 성전의 건축이었다성서에 따르면 잠언(The Book of Proverbs)과 아가(Song of Songs)서는 솔로몬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분열 왕국 시대

솔로몬 왕의 통치 말기는 그의 야심 찬 계획 때문에 커다란 고통을 겪은 민중의 불만으로 얼룩졌다. 동시에 왕 자신의 지파에 대한 특혜 대우는 다른 지파들의 원망을 샀고, 결국 왕권국가와 지파 분리주의자들 간의 반목의 골을 깊어지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솔로몬의 사망(기원전 930) 후 일어난 공공연한 반란으로 북쪽의 10개 지파가 이탈했고,이스라엘은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과 남쪽의 유다 왕국으로 분리되었다. 이 중 유다 왕국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세력권 안에 세워졌다.

사마리아를 수도로 둔 이스라엘 왕국은 19대 왕까지 200년 이상 지속되었고, 유다 왕국은 수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다윗의 혈통을 이은 19명의 왕들에 의해 400년간 통치가 이어졌다. 아시리아와 바벨론 제국의 확장으로 인해 먼저 이스라엘이, 그리고 뒤이어 유다가 외세의 점령 하에 놓이게 되었다. 북 이스라엘 왕국은 아시리아에 의해 함락되고(기원전 722) 그 주민들은 추방당하고 잊혀졌다. 그로부터 100여 년 후 바빌로니아가 남유다 왕국을 점령하면서 예루살렘과 성전을 파괴한 것은 물론 대부분의 거주민들을 추방했다(기원전 586).


최초 유배 (기원전 586~538)

바벨론의 정복으로 제1 성전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유대민족과 이스라엘 땅의 연결고리까지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바벨론의 강변 곳곳에 앉아 그들의 고국을 기억하리라 맹세하며 이렇게 노래했다.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 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 지로다.(시편 137:5~6).

1 성전의 파괴(기원전 586)에 이은 바벨론 유수는 유대인 이산(Jewish Diaspora)의 시발점이 되었다. 바로 거기서부터 유대교는 이스라엘 땅 밖에서의 종교적 틀과 삶의 방식을 발전시키기 시작했으며궁극적으로 유대인들의 민족적 생존과 영적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하나의 민족으로서 유대민족의 미래를 보호할 수 있는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2 성전시대 시온으로의 귀환


페르시아와 그리스 시대 (기원전 538~142)

기원전 538년 바벨론 제국을 정복한 페르시아 왕 키루스의 칙령에 따라 약 5만 명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땅으로 1차 귀환에 나섰다. 이들을 이끈 이는 다윗의 후손 스룹바벨이었다그로부터 한 세기가 채 지나지 않아 율법 학자 에스라의 인도 하에 2차 귀환이 이루어졌다그 후 4세기 동안 유대인들은 페르시아(기원전 538~333)와 뒤이은 헬라(프톨레마이오스와 셀레우코스 시대)의 지배(기원전 332~142하에서 다양한 수준의 자치를 체험했다.

에스라의 솔선수범적 지도 하에 이루어진 유대인들의 본국 귀환,  1 성전이 있던 터에 제2 성전의 건축, 예루살렘 성벽의 중건, 유대인의 종교적, 사법적 최고 기구인 크네세트 하그돌라(최고 회의)의 설립은 제 2 성전시대의 개막을 의미했다. 페르시아 제국의 세력권 안에서 유다는 예루살렘의 대제사장과 장로 회의에 지도력이 위임된 국가였다.

대왕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 페르시아의 위대한 왕 중 하나로, 페르세폴리스의 궁전 벽에 부조로 표현되어 있다

기원전 332년에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이 정복한 고대 세계의 일부가 된 이스라엘 땅은 시리아에 본거지를 둔 셀레우코스 왕조의 통치 하에 유대 신정국(神政國)의 상태를 유지했다. 그러나 유대 민족 전체에게 헬라 문화와 관습을 강요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유대교 행사를 금하고 성전을 모독하기에 이르자 유대인들은 그에 항거하여 들고 일어났다(기원전 166).


하스몬 왕조 (기원전 142~63)

처음에는 하스몬 왕조의 성직자 마타티아스, 그리고 뒤이어 그의 아들 유다 마카비의 주도 하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성전을 정화했다(기원전 164). 유대인들은 이 사건들을 매년 수전절(Hannuka)에서 기념하고 있다.

하스몬의 승리가 이어지자(기원전 147) 셀레우코스는 유대(이스라엘 땅을 지칭하던 당시의 명칭)의 자치권을 되돌려 주게 되었고, 셀레우코스 왕국의 몰락(기원전 129)과 함께 유대인들은 독립을 쟁취했다. 그 후 약 80년간 지속된 하스몬 왕조의 통치 하에 유대 왕국은 솔로몬 시대의 영토에 크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영토를 탈환했다. 유대인의 지배 하에 정치적 통합이 이루어지고 유대인들의 생활은 풍요로웠다.


각 시대별 메노라

로마의 티투스 개선문에 새겨져 있는 메노라(일곱 촛대)

황금 메노라(가지가 일곱 개 달린 촛대)는 고대 예루살렘에서 솔로몬 왕 성전의 예배의식 때 사용된 주요 도구였다. 그 후 오랜 시대에 걸쳐 이것은 수많은 장소에서 다양한 형태로 유대 유산과 전통의 상징이 되어왔다.



로마의 지배 (기원전 63 ~ 서기 313)

셀레우코스 왕조를 몰아내고 이 지역에 집권한 로마인들은 다메섹의 로마 총독의 지배 하에 하스몬 왕 히르카누스 2세가 제한적인 왕권을 가지는 것을 승인했다. 유대인들은 새로운 정권에 반대하여 향후 수년 간 잦은 반란을 일으켰다. 마타티아스 안티고누스가 하스몬 왕조의 지난 영광을 회복하려는 마지막 시도를 꾀했으나 그가 로마군에 패하고 사망하면서 하스몬 왕조의 통치는 끝을 맺고(기원전 40이 땅은 로마 제국의 한 주로 예속되었다.

기원전 37년에 로마인들은 히르카누스 2세의 사위 헤롯을 유대의 왕으로 임명하였다.내정에 대해서는 거의 제한 없는 자치권을 부여 받은 헤롯은 로마 제국의 동부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스 로마 문화의 열렬한 숭배자였던 헤롯은 대규모 건축 사업에 착수하여 가이샤랴와 세바스티아(사마리아)의 도시들과 헤로디움과 마사다의 요새 등을 세웠다. 그는 또한 성전을 증축하여 그 시대의 가장 웅장한 건축물로 변모시켰다.

그러나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헤롯은 유대 백성들의 신임과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


헤롯왕의 사망(기원전 4) 이후 10년이 지났을 때 유대는 로마의 직접 지배 하에 들어갔다.유대적 생활양식에 대한 로마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늘어난 유대인들의 분노는 산발적인 폭력행위로 나타나다가 서기 66년에 전면적인 반란으로 확대되었다. 티투스가 이끈 우세한 전투력의 로마군이 결국 승리를 차지했으며, 이들은 예루살렘을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고(서기 70) 유대인들의 마지막 요새였던 마사다를 함락시켰다(73).

예루살렘과 제 2 성전의 파괴는 유대 민족에게 큰 재앙과도 같았다. 당대의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 플라비우스에 의하면, 예루살렘과 그 외 다른 지역의 포위 공격 속에 유대인 수십 만 명이 죽고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이 노예로 팔려갔다.

시몬 바르 코크바의 반란(서기 132) 직후 짧은 기간 동안 유대인들은 마지막으로 독립국의 지위를 누리며 예루살렘과 유대를 탈환했다. 그러나 로마의 막강한 힘 앞에 이어질 결과는 너무도 자명했다. 3년이 지난 후 예루살렘은 로마 관습에 따라 “황소의 멍에로 갈아 엎어”졌으며, 유대는 팔레스티나, 예루살렘은 아엘리아 카피톨리나 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성전이 파괴되고 예루살렘은 모두 불타버렸지만 유대민족과 유대교만은 로마와의 충돌 속에 서도 살아남았다. 입법과 사법을 총괄하는 최고 기구 산헤드린(크네세트 하그돌라의 후신)이 서기 70년에는 야브네에서, 후에는 티베리야에서 재소집 되었다. 국가와 성전의 통합된 체 계 없이 존속된 소규모의 유대인 공동체가 점차 복구되는 한편 때때로 고향으로 돌아온 망명자들이 힘을 보탰다제도적 공동 생활이 복구되었고랍비들이 제사장의 자리를 대신하 였으며유대 회당은 유대인 공동체들의 구심점이 되었다이 점은 가버나움고라신바르 암가믈라 등지에서 발견된 유대 회당의 유물들이 잘 입증해주고 있다할라카(유대 종교 법)는 유대인들을 묶어주는 공통의 유대로 작용하며 대대로 계승되었다.



외세 지배


비잔틴의 지배 (313~636)

4세기 말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공인(313)과 비잔틴 제국 창건에 이어 이스라엘 땅 은 기독교 중심 국가가 되었다. 예루살렘, 베들레헴, 갈릴리의 기독교 성지에는 교회가 세워 졌고 나라 도처에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유대인들은 이전에 어느 정도 누렸던 자치권과 공 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했으며, 일년에 단 하루(Tisha Bav – 아브월 9)성전 파괴를 애도하는 날을 제외하고는 예루살렘 출입이 금지되었다.

614년에 페르시아 침공이 있자 유대인들은 해방에 대한 구원의 희망을 품고 이를 지원했다.유대인들은 이 같은 원조에 대한 보답으로 예루살렘 정부를 얻었고, 이 시기는 약 3년간 지 속되었다. 그러나 뒤이어 비잔틴 군대가 예루살렘을 재탈환하여(629) 다시 유대인 거주자 들을 축출했다.


아랍의 지배 (636~1099)

바위의 돔. 7세기에 움마야 왕조의 칼리프 압둘 말리크가 예루살렘 성전산(하람 알 샤리프)에 세운 사원 • I. 스툴만

아랍이 이스라엘 땅을 정복한 것은 무하마드가 사망(632)한 지 4년이 지난 때였고, 이들 의 지배는 그 후 4세기가 넘게 지속되었다. 처음에는 다메섹에서, 그 후에는 바그다드와 이 집트에서 여러 칼리프들이 이 지역을 통치했다. 지배 초기에는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거주가 재개되고 유대인 공동체에게는 딤미(dhimmi, 보호 대상이 되는 비무슬림들)라는 관습적 지 위가 주어졌다. 이로서 유대인들은 생명과 재산, 예배의 자유를 보장받는 대신 특별 인두세 와 토지세를 납부해야 했다.

그러나 그 후 비이슬람교도에게 가해진 각종 규제조치(717)는 유대인들의 종교 의식, 적 지위 및 공적 행동에 악영향을 미쳤다경작지에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여 많은 사람들이 시골을 떠나 도시로 이주하였으나 그곳에서도 그들의 형편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또한 사회적경제적 차별이 심해짐에 따라 아예 고국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었다. 11세기 말에 이 르자 이스라엘 땅의 유대인 사회는 규모가 크게 줄어들었고 조직적종교적 응집력도 약화되었다.


십자군 시대 (1099~1291)

이후 200년간 이스라엘을 지배한 것은 십자군 세력이었다. 십자군은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호소에 따라 이교도들에게서 성지를 되찾기 위해 유럽에서 진군해왔다. 1099 7, 5주간의 포위공격 끝에 제 1차 원정군의 기사들과 그들이 이끌고 온 하층민 군대는 예루살렘을 점 령하고 그곳에 거주하던 비기독교인들 대부분을 학살했다. 유대인들은 회당 안에 장벽을 쌓 아 자신들의 거점을 방어하려 했지만 결국 불에 타 죽거나 노예로 팔려갔다. 그 후 수십 년 에 걸쳐 십자군은 이스라엘의 다른 지역까지 세력을 넓혀갔는데, 조약과 협정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유혈 군사 정복을 통한 확장이었다. 십자군의 라틴 왕국은 주로 요 새화된 도시와 성에만 국한된 소수 정복자들의 왕국이었다.


십자군이 유럽에서 이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로를 열자 성지 순례가 일반화된 것과 동시에 고향 땅으로의 귀환을 시도하는 유대인들의 수도 늘어났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300명의 랍비가 프랑스와 영국에서 무리를 지어 들어와 일부는 악고(아크레), 일부는 예루살렘에 정착했다.

십자군이 살라딘 휘하의 이슬람군에게 격파된(1187) 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할 수 있는 권리를 비롯해 어느 정도의 자유를 되찾았다. 살라딘의 죽음(1193) 후 십자군이 다 시 이 나라에 기반을 얻었지만 그들의 주둔지는 일련의 요새화된 성에 국한되었다.

십자군이 이집트에서 권력을 잡은 이슬람 마믈루크 군대에게 최종적으로 패하면서(1291)십자군의 이스라엘 지배는 종식되었다.


마믈루크의 지배 (1291~1516)

마믈루크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된 이스라엘 땅은 다메섹 관할 하의 고립 지역이 되었다. 악 고, 욥바를 비롯한 여러 항구들은 새로운 성전(聖戰)에 대비해 파괴되었고 육로와 해상 교역 모두 중단되었다. 중세 말에 이르자 이 나라 도시들은 사실상 폐허가 되고 예루살렘의 대부 분 지역이 버려진 바 되었으며 소규모 유대인 공동체는 가난에 허덕였다. 마믈루크의 쇠퇴 기는 정치적∙경제적 격변과 전염병, 메뚜기떼, 지진 강타 등으로 더욱 암울한 시기였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 (1517~1917)

1517년에 오스만 제국에 정복된 이스라엘 땅은 네 구역으로 분할되었고, 행정적으로 다메섹 에 포함되어 이스탄불의 지배를 받았다. 오스만 제국 시대 초기에는 약 1,000호의 유대인 가구가 이 땅에 살았는데, 주로 예루살렘, 나블루스(세겜), 헤브론, 가자, 사페드(츠파트), 갈 릴리 마을 등지에 거주했다. 이 유대인 공동체는 이스라엘 땅을 떠난 적이 없는 유대인 후 손들과 북아프리카와 유럽에서 이주해온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술레이만 대제가 죽을 때까지(1566) 오스만 제국의 안정된 정부에 의해 상황이 개선되면 서 유대인들의 이주가 활발해졌다. 새로 이주해온 이들 중 일부가 예루살렘에 정착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사페드 지역으로 갔다. 16세기 중반에 이르자 사페드의 유대인 인구는 대 략 1만 명으로 증가했고 이 도시는 활발한 지적 활동의 중심이자 직물생산의 중심지로 번 창하였다.

이 기간 동안 카발라(유대 신비주의)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법전화된 <슐한 아루크>같은 유대법률에 대한 당대의 해석들이 사페드의 여러 학파들로부터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 는 유대인 사회로 퍼져 나갔다.

오스만의 지배 체제가 점차 열악해지면서 이스라엘 땅은 크게 방치되었다. 18세기 말에는 많은 토지가 부재 지주들의 소유 하에 궁핍한 소작 농민들에게 임차되었고 세금은 일관성 없이 마구잡이로 부과되었다갈릴리의 대삼림과 카르멜 산맥은 벌목되고 농경지는 습지와 사막에 침식되었


근대기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중세의 후진성은 점차 사라지고 진보의 신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서 양의 여러 열강이 교묘한 책략으로 세력을 다지고자 했는데, 주로 선교활동이 진입 수단이 되었다. 영국, 프랑스, 미국의 학자들이 성서 고고학 연구에 착수했고, 영국, 프랑스, 러시아,오스트리아, 미국이 예루살렘에 영사관을 개설했다. 기선이 이 땅과 유럽 사이를 정기 운항 하기 시작했고, 우편과 전신이 연결 설치되었으며 예루살렘과 욥바를 잇는 도로가 최초로 건설되었다. 세 대륙을 연결하는 교역의 중심지로서 이스라엘 땅의 재탄생은 수에즈 운하의 개통으로 더욱 가속화되었다.

그 결과 이곳 유대인들의 상황이 서서히 개선되었고 이들의 인구도 크게 증가했다. 19세기 중반 유대인들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예루살렘의 인구 과밀 상황으로 인해 성벽 바깥에 최초로 교외 거주 지역을 건설했고(1860), 향후 25년간 7개 지역을 추가로 건설하여 이 신도시의 핵을 형성하였다. 1870년에 이르자 예루살렘 전체 인구의 과반수가 유대인이었다.이스라엘 전역에 걸쳐 농경지가 매입되고, 농촌 마을들이 새로이 형성되었다. 오랫동안 예 배의식과 문학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되던 히브리어도 다시 부활했다. 시온주의 운동이 태 동할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이주

시온주의로 동기부여를 받고, 유대인들의 시온주의 이상에 대한 영국의 동조로 나타난 외무 장관 밸푸어 경의 선언(1917)에 고무되어 1919년에서 1939년 사이에 이스라엘 땅으로 들 어오는 이주민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이들은 유대인 공동체를 발전시키는데 있어 각기 다른 측면에서 기여를 했다. 1919년에서 1923년 사이에 주로 러시아에서 건너온 3 5천여 명은 향후 수년간 공동체의 성격과 조직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들 개척자들은 포괄적 인 사회∙경제적 하부구조의 초석을 마련했으며, 농업을 발전시키고 독특한 공동체적 조합 형태의 농촌 거주집단인 키부츠(kibbutz)와 모샤브(moshav)를 설립했으며주택과 도로 건설 을 위한 노동력을 제공하였다.

그 뒤를 이어 1924년과 1932년 사이에 주로 폴란드에서 온 약 6만 명의 이주민들은 도시 생활을 발전시키고 풍요롭게 하는 역할을 했다. 이들은 주로 텔아비브, 하이파, 예루살렘에 정착하여 중소기업과 건설회사, 경공업체를 설립하였다. 2차 세계대전 전에 마지막으로 약16 5천 명의 유대인이 대규모로 들어왔는데, 이 이주는 1930년대 히틀러가 독일에서 정 권을 잡은 직후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상당수가 전문가와 학자로 구성되어 있던 이 신규 이 주민들은 중서부 유럽에서 온 최초의 대규모 유입 인원이었다. 이들의 학력과 기술, 경험은 비즈니스 표준을 높이고 도시와 시골의 편의시설을 개선했으며 유대인 공동체의 문화생활을 풍성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


행정

영국의 위임통치 당국은 유대인과 아랍인 집단 사회에 각각의 내부문제를 직접 관리할 수 있는 자치권을 부여했다. 이 권한을 활용하여 유대 공동체 이슈브(Yishuv)는 정당 대표성을 바탕으로 자치 기구를 선출했다. 이 기구는 매년 모임을 가져 활동상황을 점검하고 여러 정 책과 프로그램을 실행할 민족 평의회(Vaad Leumi, 바아드 레우미)를 선출했다. 현지 자원과 세계 각지의 유대인들이 모금한 기금을 토대로 나라 전역에 걸친 교육, 종교, 보건, 사회 서 비스망이 개발되고 유지되었다. 1922년에는 위임 통치령에 명기된 대로 ‘유대인 기구’가 구 성되어 영국 당국과 외국 정부, 국제 조직들에 대하여 유대 민족을 대표하는 역할을 했다.


경제 발전

30년의 위임통치 기간 동안 농업은 확대되고 공장들이 세워졌으며 나라 전역에 새 도로가 건설되었다. 또한 요르단 강의 물을 이용하여 전력을 생산했고, 사해의 광물 자원을 개발했 다. 노동 총연맹인 히스타드룻(Histadrut)이 설립되어(1920) 산업부문에 조합 소유의 기업 체를 세우고 농촌지역에 대한 서비스를 판매함으로써 노동자들의 복지를 증진시키고 일자리 를 제공했다.


문화

시간이 지나면서 문화적 생활양식이 등장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땅의 유대인 사회만의 고 유한 형태를 띠었다. 미술, 음악, 무용이 전문학교와 스튜디오의 설립과 함께 서서히 발전했 다. 화랑과 연주회장은 각종 전시와 공연을 위한 장소를 제공해주었고, 심미안을 지닌 대중 들이 이를 관람했다. 새로운 연극의 개막, 새로운 책의 출간, 지역 화가의 회고전 등이 있으 면 언론은 즉시 분석기사를 내놓았고 대중들은 커피숍과 사교 모임에서 이들을 주제로 열띤 토론을 벌였다.

히브리어가 영어와 아랍어와 함께 이스라엘의 공식어로 인정되면서 각종 문건, 동전, 우표,라디오 방송 등에 사용되었다. 히브리어로 된 출판이 급증했고, 이스라엘은 히브리 문학 활 동의 세계적 중심지로 부상했다. 다양한 장르의 극작품들이 열광적인 청중을 대상으로 문을 열었고, 히브리어로 극본을 쓰는 작업이 최초로 시도되었다.

유대의 민족적 부흥과 유대인 공동체의 국가 재건 노력은 아랍 민족주의자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쳤다이들의 적개심은 1920, 1921, 1929, 1936~39년의 기간에 걸쳐 격렬한 폭동 으로 분출되어 유대인들에 대해 이유 없는 공격이 가해졌다유대인 교통수단이 공격 당하 고 들과 숲이 불탔으며 1929년에는 헤브론 학살이 일어났다시온주의자들이 초기에 취한,아랍인들과의 대화를 시도하려는 노력이 결국 실패로 끝나면서 시온주의와 아랍 민족주의는 양극으로 치달으며 폭발 직전의 상태가 되었다두 민족 운동의 상반되는 목표를 인식한 영 국 측은 나라를 둘로 나눠 한쪽은 유대 국가로다른 한쪽은 아랍 국가로 정하되 둘을 하나 의 경제 연합으로 묶을 것을 제안했다(1937). 유대인 지도층은 이 분할 권유를 받아들였 고이 제안의 여러 측면을 재공식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유대인 기구에 영국 정부와의 협상 권한을 위임했다그러나 아랍인들은 모든 분할 계획에 강경한 반대 자세를 취했다.

아랍의 대규모 반 유대 폭동이 계속되자 영국은 유대인의 이주를 강력히 규제하는 백서를 발행했다(1939 5). 이는 유럽의 유대인들에게 나치의 박해에 대한 피난처 제공을 부정 하는 결과를 낳는데도 불구하고 시행된 조치였다.


그 직후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후에 이스라엘의 초대 총리가 된 다비드 벤 구리온은 이와 같이 선언했다.
“우리는 백서가 발표되지 않은 것처럼 전쟁에 나가 싸울 것이며,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것 처럼 백서와 싸울 것이다.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

 2차 세계대전 동안(1939~45) 나치 정권은 유럽의 유대인 공동체를 말살하려는 고의적 계획을 치밀하게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150만 명의 어린이를 포함해 600만에 달하 는 유대인을 살해했다. 나치군이 유럽 전역을 휩쓸 때 유대인들은 무자비한 박해를 받고 고 통과 굴욕을 당했으며 강제 거주 지구인 게토로 내몰렸다. 이곳에서 무장 저항을 시도했으 나 돌아온 것은 더욱 거센 탄압뿐이었다. 유대인들은 게토에서 다시 수용소로 옮겨졌는데,소수의 운 좋은 이들은 강제 노동을 당했지만 대부분은 집단으로 총살 처형되거나 가스실에 서 죽음을 맞았다. 이곳을 벗어날 수 있었던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일부는 다른 나라로 탈출 했고, 소수는 게릴라에 합류했으며, 일부는 생명의 위협을 무릅쓴 비유대인들의 도움으로 숨을 수 있었다. 그 결과, 한때 세계에서 가장 대규모의 활기찬 유대인 공동체를 구성했던 약 900만의 인구 중 3분의 1만이 살아남았으며, 그것도 전쟁 전에 유럽을 떠난 사람들을 포함한 숫자이다.


전쟁 후 아랍의 반대가 있자 영국은 이스라엘 땅에 들어와 정착할 수 있는 유대인의 수를 더욱 엄격히 제한하였다. 그러자 유대인 공동체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를 구하기 위한 광범위 한 “불법 이민” 활동 네트워크를 조직하여 이에 맞섰다. 1945년에서 1948년 사이에 약 85천 명의 유대인들이 비밀리에, 대부분 위험한 경로를 통해 이스라엘 땅에 들어왔다. 난민 들이 이 땅에 닿지 못하도록 차단하기 위해 영국이 해안을 봉쇄하고 국경 순찰대를 배치했 음에도 불구하고 들어온 것이었다. 도중에 잡힌 사람들은 사이프러스 섬의 임시 수용소에 억류되거나 유럽으로 돌려 보내졌다.


독립으로 가는 길

유대와 아랍 사회의 상충되는 요구를 중재할 수 없었던 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유 엔 총회의 의제로 상정할 것을 요청했다(1947). 그리하여 특별 위원회가 구성되어 이 나라의 장래에 관한 제안서를 작성했다. 1947년 11월 29유엔 총회는 투표를 통해 이스 라엘을 각각 유대와 아랍의 두 국가로 나누자는 위원회의 권고안을 채택했다유대인 공동 체는 이 계획을 수락했으나 아랍측은 거부했다.

유엔의 투표가 있은 후, 아랍 국가들의 비정규적 지원군들의 원조를 받는 지역의 아랍 민병 대는 유대인 사회에 대해 맹렬한 공격을 개시하여 분할 결정을 좌절시키고 유대 국가 수립 을 막고자 했다. 유대 방위 조직들은 여러 번의 후퇴 끝에 대부분의 공격군을 몰아내고 유 대 국가로 할당된 지역 전체를 손에 넣었다.

1948 5 14일 영국의 위임 통치가 종식되었을 때 이 지역의 유대인 인구는 약 65만 명 에 달했고 이들은 정치, 사회, 경제적 기반을 제대로 갖춘 조직적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었 다. 사실상, 모든 의미에서 하나의 나라였고, 이름만 없을 뿐 이미 하나의 국가였던 것이다.



이스라엘


1947년 분할 계획 (유엔 결의안 181)

Lebanon-레바논/ Syria-시리아/ Transjordan-트랜스요르단/ Egypt-이집트/ Mediterranean Sea-지 중해/ Haifa-하이파/ Tel Aviv-텔아비브/ Jaffa-욥바 / Jerusalem-예루살렘/ Beer Sheva-브에르셰바
■ 유대국가

■ 아랍국가 

□ 국제지역


1949~1967년 휴전선

Lebanon-레바논/ Syria-시리아/ Jordan-요르단/ Israel-이스라엘/ Egypt-이집트/ Mediterranean Sea-지중해/ Haifa-하이파/ Tel Aviv-Yafo-텔아비브-욥바/ Samaria-사마리아/ Judea-유대/ Jerusalem-예루살렘/ Gaza-가자/ Beer Sheva-브에르셰바
 이스라엘

 요르단 통치령
 이집트 정부 통치령


1948 5 14일 이스라엘은 독립을 선언했다. 그로부터 24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이집트,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의 정규군이 침공해 옴으로써 이스라엘은 선조의 땅에서 되 찾은 주권을 지켜야만 했다.

이스라엘 독립전쟁으로 알려진 이 싸움에서 새로이 구성되어 준비가 미흡했던 이스라엘 방 위군(IDF)은 간헐적으로 일어난 격렬한 전투 속에 침략군을 격퇴하며 승리를 거뒀다. 이 전 쟁은 약 15개월간 지속되었고 6,000명이 넘는 이스라엘인(당시 이스라엘의 유대인 인구의1%에 가까운 수치)이 목숨을 잃었다.

1949년 초 몇 달간 유엔의 중재 하에 이스라엘과 각 침략국(이스라엘과의 협상을 거부한 이라크를 제외한 나머지) 간에 직접 협상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종전 상황을 반영한 휴전 협정을 체결하였다. 협정에 따라 해안 평야와 갈릴리와 네게브 지역 전체가 이스라엘의 통 치권에 속하게 되었다. 유대와 사마리아(서안 지구)는 요르단이 통치하게 되었고 가자 지구는 이집트의 행정권 안에 편입되었다예루살렘은 양분되어 구시가지가 포함된 동부는 요르 단이서부 지역은 이스라엘이 관할하게 되었다.


국가 건설

전쟁이 끝나고 이스라엘은 그들 민족이 오랜 기간 힘겨운 투쟁으로 되찾은 국가의 건설을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전체 유권자의 85%에 육박하는 이들이 참여한 총선(1949 1 25)을 통해 제 1회 크네세트(의회) 120석 규모로 개원하였다. 이스라엘을 국가의 위치에 올려놓는 일에 주역이 된 두 사람이 지도자가 되었다. 유대인 기구의 의장 다비드 벤 구리 온이 초대 총리로 선택되었고, 세계 시온주의자 협회 회장 하임 와이즈만이 국회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49년 5월 11일에는 이스라엘이 유엔의 59번째 공식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이스라엘의 존재 이유의 핵심이 되는 ‘이산민 되 모으기’라는 구상에 따라 나라의 문호가 활 짝 열리면서 모든 유대인이 이스라엘로 들어올 수 있는 권리와 입국과 동시에 시민권을 획 득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되었다. 독립 후 처음 4개월 동안 대부분 홀로코스트 생존자들로 구성된 약 5만 명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들어왔다. 1951년 말까지 아랍 각지에서 피난 온 30만여 명을 포함하여 총 68 7천 명의 성인 남녀와 어린이들이 도착하면서 유대 인구 가 배로 늘어났다.

독립전쟁으로 야기된 경제적 부담과 급증하는 인구를 부양할 필요성에 따라 국내적인 긴축 재정과 해외로부터의 재정적 원조가 불가피했다.

미국 정부의 원조와 미국 은행들의 차관, 재외 거주 유대인들의 기부금, 전후 독일의 배상 금 등이 모두 주택 건설, 농업의 기계화, 상선대와 국적 항공사의 설립, 광물 개발, 산업 발전과 도로통신전력망 확대에 사용되었다.

건국 10주년이 다가올 무렵에는 산업 생산량과 고용 인구 수가 2배로 늘고 산업 수출은 4배로 증가했다. 경작 면적이 크게 확대되어 육류와 곡물을 제외한 모든 기초 식품을 자급하 게 되었으며, 대부분 황무지였던 약 5만 에이커의 부지를 녹지화하고 500 마일(800 km)에 이르는 고속도로변에 나무를 심었다.

유대인 공동체가 건국 이전부터 발전시켜온 교육 체계는 이제 아랍 지구까지 포괄하며 크게 확대되었다. 5~14세 어린이 모두에게 무상 의무 교육이 실시되기 시작했다(1978년부터 의무 교육은 16, 무상 교육은 18세까지로 변경됨). 문화와 예술 활동이 꽃피면서 중동과 북아 프리카, 서구의 요소가 혼합되었다. 이는 세계 각지에서 이주해온 유대인들이 수대에 걸쳐 거주했던 나라의 주요한 문화적 측면과 그들 공동체의 독특한 전통을 가지고 들어오면서 비 롯된 현상이었다. 이스라엘 건국 10주년이 되자 이 나라 인구는 2백만을 넘어섰다.


1956년 시나이 분쟁

건국 후 수년 동안 이스라엘에 그늘을 드리운 것은 심각한 안보 문제였다. 1949년의 휴전 협정은 영구적인 평화에 이르는 길을 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위반 사례가 나타 났다. 1951 9 1일의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과는 상반되게 이스라엘 선박과 이스 라엘 행 선박의 수에즈 운하 통과가 금지되었으며 티란 해협의 봉쇄가 강화되었다. 인접 아 랍 국가들의 테러 공격대가 살인과 방해 공작을 목적으로 이스라엘에 침투하는 사건이 날로 증가했다. 시나이 반도는 점차 거대한 이집트 군사 기지로 변했다.


1956년 시나이 분쟁

 이스라엘
 요르단 통치령
 이스라엘이 점령했다가 반환한 지역

Lebanon-레바논/ Syria-시리아/ Jordan-요르단/ Saudi Arabia-사우디 아라비아/ Egypt-이집트/ Mediterranean Sea-지중해/ Red Sea-홍해/ Straits of Tiran-티란 해협/ Haifa-하이파/ Tel Aviv- Yafo-텔아비브-욥바/ Samaria-사마리아/ Judae-유대/ Jerusalem-예루살렘/ Beer Sheva-브에르 셰바 / Sinai-시나이/ Eilat-에일랏


1956 10월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이 3국 군사 동맹을 체결함과 동시에 이스라엘의 생존 에 긴박한 위협이 대두되었다. 8일 간의 전투에서 이스라엘 방위군(IDF)은 가자 지구와 시나 이 반도를 점령했으며 수에즈 운하의 동쪽 10마일(16 km) 선상에서 정지하였다. 유엔이 이 집트-이스라엘 국경선에 유엔 긴급군(UNEF)을 배치하기로 결의하고 이집트가 에일랏 만 자 유 항행을 보장함에 따라 이스라엘은 몇 주 전에 점령했던 이 지역에서 단계적으로 철수(1956년 11~1957년 3)하는데 동의했다그 결과 티란 해협이 개방되어 페르시아만으로 부터의 석유 수입과 아시아와 동아프리카 국가들과의 교역 발전이 가능해졌다.


확립기

이스라엘의 두 번째 10(1958~68) 동안 수출은 두 배로 늘고 국민총생산(GNP)은 매년 약 10%씩 증가했다. 종이, 타이어, 라디오, 냉장고 등 기존에 수입하던 일부 품목들을 국내 에서 생산하기 시작하는 한편 금속, 기계, 화학, 전자 등 신설 분야는 가장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다. 국산 식품의 국내 시장이 빠른 속도로 포화 상태에 가까워짐에 따라 농업 부문은 수출용 청과물과 식품 가공업계에 공급할 다양한 농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늘어난 교역 량을 소화하기 위하여 기존의 하이파 항 외에 지중해 연안 아슈돗 (아스돗)에 두 번째 심해 항을 건설했다.


예루살렘에는 크네세트(의회)의 영구적인 근거지가 지어졌고, 히브리 대학과 하닷사 의료 센 터의 부속 시설들이 독립 전쟁 후 사용할 수 없게 된 스코푸스 산에 있던 구 건물들을 대신 해 새로운 부지에 건설되었다. 이와 동시에, 유대민족의 문화예술 유산을 수집, 보존, 연구,전시할 목적으로 이스라엘 박물관이 설립되기도 했다.


이스라엘은 미국, 영연방, 대다수의 서유럽 국가, 남미와 아프리카의 거의 모든 국가, 일부 아시아 국가들과 긴밀한 공조관계를 맺으면서 대외 관계를 꾸준히 확대했다. 광범위한 국제 협력 프로그램이 전개되어 수백 명의 이스라엘 의사와 엔지니어, 교사, 농업 경제학자, 관개 전문가, 청소년 전문가가 여타 개발도상국 사람들에게 그들의 노하우와 경험을 전해주었다. 1965년에는 독일 연방 공화국과의 대사 교환이 이루어졌다. 이는 나치 정권 동안(1933~45) 유대인들에게 자행됐던 범죄에 대한 쓰라린 기억 때문에 그때까지 지연되어온 조치였다.격렬한 반대와 사회적 논쟁 끝에 마침내 양국의 관계 정상화가 이루어졌다.


1967 6일 전쟁

이집트와 요르단 국경 지역에서 아랍 테러단체의 기습 증가와 북부 갈릴리의 농경 정착지에 대한 시리아 포병대의 지속적인 폭격, 인근 아랍 국가들의 대대적인 군사력 증강으로 인해 이제 어느 정도 평온한 시기가 오리라는 희망은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1967 5월 이집트 는 대규모 군대를 시나이 사막으로 이동시키고 1957년부터 그 지역에 배치되어 있던 유엔 평화 유지군에게 철수를 명령했으며, 티란 해협을 다시 봉쇄하고 요르단과 군사 동맹을 체 결했다. 이에 이스라엘은 모든 전선에서 적대적인 아랍 군대들과 직면하게 되었다. 인접국 들이 이 유대국가를 무너뜨릴 채비를 갖춤에 따라 이스라엘은 고유의 자위권을 발동하여1967 6 5일 남쪽의 이집트에 선제 공격을 가했으며, 뒤이어 동쪽의 요르단에 반격을 가하고 북쪽의 골란 고원에서 보루를 구축하고 있던 시리아군을 패주시켰다.


6일 전쟁 후의 휴전선, 1967

Lebanon-레바논/ Syria-시리아/ Jordan-요르단/ Saudi Arabia-사우디 아라비아/ Egypt-이집트/ Red Sea-홍해/ Straits of Tiran-티란 해협/ Mediterranean Sea-지중해/ Haifa-하이파/ Tel Aviv- Yafo-텔아비브-욥바/ Jerusalem-예루살렘/ Beer Sheva-브에르셰바 Sinai-시나이/ Eilat-에일랏


6일 간의 전투가 끝날 무렵, 이전의 휴전선이 새롭게 변경되어 유대, 사마리아, 가자, 시나 이 반도, 골란 고원이 이스라엘의 관할 하에 들어왔다. 그 결과 북부 지방의 마을들은 19년 간 주기적으로 일어났던 시리아의 포격에서 해방되었으며, 이스라엘 선박과 이스라엘 행 선 박은 티란 해협을 통과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1949년 이래로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공동 통치를 받으며 분리되어 있던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통치권으로 재통합되었다.


전쟁에서 전쟁으로

전쟁이 끝난 후 이스라엘의 외교적 과제는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 결의안 242호를 기초로 자국의 군사적 성과를 영구적 평화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유엔의 결의안은 "이 지역 모든 국가의 주권, 영토 보전, 정치적 독립과 안전하고 승인된 국경 내에서 군사적 위협과 행동 으로부터 자유로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1967 8월의 카르툼 정상회담에서 공식화된 아랍의 입장은 "이스라엘과의 평화와 협상, 이 스라엘에 대한 인정은 없다"는 내용이었다. 1968 9월에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 제방을 따 라 산발적이고 정적인 군사행동을 하는 ‘소모전’을 개시했고, 이는 전면적인 국지전으로 확 대되어 양측에 다수의 사상자를 냈다. 교전 상태는 1970년에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수에즈 운하를 따라 새로 그어진 휴전선을 수락하면서 막을 내렸다.


1973년 욤 키푸르 전쟁

3년간 비교적 조용하던 국경지대의 평화는 유대력에서 가장 신성한 날인 욤 키푸르(속죄일)

에 산산조각이 났다. 이날 이집트와 시리아는 이스라엘에 합동 기습 공격을 개시하여(1973 10 6) 이집트군이 수에즈 운하를 건넜고 시리아 군대는 골란 고원에 침입했다. 이후3주 동안 이스라엘 방위군은 전세를 역전시켜 침략군을 격퇴했으며, 수에즈 운하를 건너 이 집트 안으로 들어섰고 시리아의 수도 다메섹 내 20마일(32 km)까지 진격했다. 이스라엘과 이집트, 이스라엘과 시리아 간에 2년간 힘겹게 진행된 협상 결과 병력 철수 협정이 조인되 었으며, 이에 따라 이스라엘은 전쟁 중 점령한 일부 영토로부터 철군하였다.


1982년 갈릴리 평화작전

이스라엘은 북쪽 국경에 인접한 레바논과의 충돌을 결코 원치 않았다. 그러나 1970년에 팔 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요르단에서 추방된 뒤 레바논 남부로 본거지를 옮기고 이스라엘 북부지역(갈릴리)의 마을과 촌락에 지속적으로 테러 행위를 저질러 많은 사상자와 피해가 생기게 되자 이스라엘 방위군은 국경선을 넘어 레바논으로 진격하였다(1982). “갈릴리 평화작전”은 PLO의 조직적이고 군사적인 하부기반의 대부분을 이 지역에서 몰아내는 결과를 가져왔다이스라엘은 갈릴리 지역민들을 적군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향후 18년간 북쪽 국경에 인접한 레바논 남부에 작은 안전 완충지대를 유지했다.


International Boundary - 국제 국경/ Ceasefire Line – 휴전선/
Lebanon-
레바논/ Syria-시리아/ Jordan-요르단/ Saudi Arabia-사우디 아라비아/ Egypt-이집트/ Red Sea-홍해/ Mediterranean Sea-지중해/ Haifa-하이파/ Tel Aviv-Yafo-텔아비브-욥바/ Jerusalem-예루살렘/ Beer Sheva-브에르셰바 / Eilat-에일랏/ Sinai-시나이


이집트와 요르단과의 평화


전쟁에서 평화로

1977년 의회 선거 결과 거의 30년에 가까운 노동당 집권이 끝을 맺고 리쿠드 당(우파와 중 도파의 연합 정당)이 집권하게 되었다. 신임 총리 메나헴 베긴은 이 지역의 항구적인 평화 를 위해 힘쓰겠다는 모든 전임 총리들의 공약을 되풀이하며 아랍의 지도자들이 협상 테이블 로 나설 것을 촉구했다.

이스라엘의 평화 호소에 아랍이 거부를 표시하던 순환의 고리는 1977 11월 안와르 사다 트 이집트 대통령의 예루살렘 방문으로 마침내 깨지고, 그 후 미국의 중재 하에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협상이 이어졌다. 1978 9월에 이루어진 이 캠프 데이비드 협정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자치에 대한 상세한 제안을 비롯하여 중동 지역 전반의 평화를 위한 틀을 포함하는 내용이었다.

1979 3 26,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워싱턴에서 평화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양국간의 30년에 걸친 전쟁 상황에 종지부를 찍었다. 조약 내용에 따라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에서 철 수했으며 기존의 휴전선과 휴전 협정을 상호 인정된 국제 국경으로 전환하였다.

1991년 마드리드 평화회의 이후 요르단과 이스라엘 간에 진행된 3년간의 회담은 1994 7월 요르단 하심 왕국의 후세인 국왕과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의 선언으로 정점을 맞이하며 46년간 계속된 두 나라 간의 전쟁 상태를 종식시켰다요르단-이스라엘 평화협정은1994년 10월 26일 아라바 국경지역(이스라엘의 에일랏과 요르단의 아카바 근처)에서 빌 클 린턴 미 대통령의 주재 하에 서명이 완료되었다.


국내 문제

1980년대와 90년대에 이스라엘은 1백만 명이 넘는 새로운 이민자들을 흡수했다. 이들은 주 로 구 소련과 동유럽, 에티오피아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다수의 숙련 및 비숙련 노동자들과 수많은 신규 소비자들의 유입으로 이스라엘의 경제 팽창이 가속화되었다.

1984년의 의회 선거로 집권한 내각은 노동당(좌파/중립)과 리쿠드당(우파/중립)이라는 양대 정당의 연합으로 구성되었다. 이후 1988년에는 리쿠드당이 주도하는 연립정당이 정권을 잡 았고, 1992년에는 노동당과 중도 좌파 군소 정당들의 연립정부가 그 뒤를 이었다. 1995년에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암살된 뒤 1996년에 새로운 선거가 실시되었다. 총리 선출을 위한 직 접 선거로 베냐민 네타냐후가 당선되어 리쿠드당 중심의 연립내각을 구성했다. 그로부터 3년도 채 안돼 네타냐후 정부는 퇴진했다. 1999년 하나의 이스라엘 당(좌파/중도)의 대표 에 후드 바락이 총리로 선출되어 연립 내각을 구성하였으나 2000 12월에 사임했다. 리쿠드당 총수 아리엘 샤론은 2001년 초부터 뇌졸중으로 쓰러진 2006년 초까지 총리직을 지냈 다샤론 총리가 2005년 11월에 출범시킨 카디마당의 수장 에후드 올메르트가 샤론의 뒤를 이어 총리 자리에 올랐다.

모든 내각은 각각 고유의 정치적 신념에 따라 평화 달성과 경제 발전이민자 통합을 위해 노력을 경주했다.



평화 협상


1979년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이 조인된 후 중동의 평화 협상을 촉진하기 위해 이스라 엘과 여러 국가들은 다양한 구상을 제안했다. 이러한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이뤄 199110월 미국과 구소련의 중재 하에 이스라엘,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팔레스타인의 대표들이 한 자리에 모인 마드리드 평화회의가 열렸다. 이 같은 정식 절차에 이어 당사자들 간의 양 자간 협상과 지역 문제를 다루는 다자간 협상이 뒤따랐다.


양자간 협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수개월 간 오슬로에서 진행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협상 대표들의 집중적인 막후접촉에 이어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에서의 팔레스타인 인들의 자치에 대한 합의내용을 개괄한 원칙 선언(Declaration of Principles: DOP)이 공식화 되었다. 1993년 9월 13일에 이루어진 조인에 앞서 PLO의 야세르 아라파트 의장과 이츠하크 라빈 총리 간에 서신 교환이 있었다이 서신에서 PLO는 테러 사용을 포기하고 자체 규약 에서 이스라엘의 존재할 권리를 부정하는 조항을 무효화할 것을 약속했으며수십 년간 지 속된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데 전념하겠다고 밝혔다그에 대한 답으로 이스라엘은PLO를 팔레스타인 민족의 대표 기구로 인정했다.

원칙 선언은 5년의 팔레스타인 자치 잠정기간에 대해 양측이 합의한 제반 원칙들과 이스라 엘-팔레스타인 협상의 여러 단계의 기본 틀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가자 지구와 여리고 지역 내 팔레스타인 자치에 대한 합의내용이 1994 5월에 이행되었으며, 그로부터 3개월 뒤에 는 서안 지구의 교육 및 문화, 보건, 사회 복지, 직접 과세, 관광 분야에 대한 권한과 책임 이양이 이루어졌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서명한 원칙 선언과 기타 합의문들은 19959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잠정 협정이 체결됨으로써 완성을 보았다.

잠정 협정은 선거로 선출된 자치 기구인 팔레스타인 의회(1996 1월에 선출)를 통해 팔레 스타인의 자치를 확대하고 서안 지구에서 이스라엘 방위군(IDF)을 지속적으로 재배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협정은 또한 최종 지위 협정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 계를 관장하는 메커니즘을 제시했다. 잠정 협정에 따라 서안 지구는 다음과 같이 세 지역으 로 나누어졌다.


A 지역 – 서안 지구의 주요 도시들로 구성. 팔레스타인 의회가 이 지역의 민정과 내부 안보,공공 질서를 전적으로 관리한다. (헤브론시는 잠정 협정에 명시된 특별 합의 대상이었다. 헤 브론 내 방위군 재배치에 관한 협안은 1997 1월에 조인되었다.)

B 지역 – 서안 지구의 작은 시와 마을들로 구성. 팔레스타인 의회가 민정(A 지역과 동일)과 공공 질서 유지의 책임을 담당하는 한편 이스라엘은 자국 시민들의 안전과 테러 퇴치에 최 우선적인 안보 책임을 계속 유지했다.

C 지역 – 서안 지구 중 유대인 거주지 전체, 이스라엘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 거주민 이 거의 없는 지역들로 구성. 영토와 관련한 민정 책임(지역 계획, 구획, 유적 등)을 비롯해 보안과 공공 질서를 이스라엘이 전적으로 관리한다. 팔레스타인 의회는 이를 제외하고 팔레 스타인 인구의 나머지 모든 민정 분야에 관한 책임을 맡는다.

잠정 협정에 명시되어 있는 추가적인 방위군 재배치 단계의 이행을 위한 일정은 양측에 의 해 여러 번에 걸쳐 개정되었다. 그 중에서도 1998 10월의 와이 리버 협정이 특히 주목할 만하다. 이같이 합의된 개정안에 따라 이스라엘은 2000 3월에 추가 재배치(FRD) 절차 중1, 2단계를 완료했다. 이러한 재배치의 결과 서안 지구 중 18% 이상이 A 지역으로, 21% 상이 지역으로 지정되었고서안 지구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인구의 98%가 팔레스타인 의 자체 관할 하에 생활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간 항구적 타협안의 성격을 결정짓기 위한 양측의 최종 지위 협상은 예정했던 대로 1996년 5월에 시작되었다. 1996년에 예루살렘과 텔아비브에서 하 마스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자행된 자살폭탄 테러는 평화 협상 과정을 바라보는 이스라엘의 관점을 어둡게 했다이후 3년간 중단되었던 최종 지위 협상은 1999년 9월 샤름 엘 셰이크 협정 후에야 재개되었다협상에서 다룰 사안들에는 난민정착촌안보 문제국경예루살 렘 등이 있었다빌 클린턴 미 대통령의 초청으로 이스라엘 총리 에후드 바락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야세르 아라파트는 2000년 7월 캠프 데이비드에서 정상회담에 참석하여 협 상을 재개했다이 회담은 아라파트 수반이 관대한 제안을 수락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아 무런 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끝났다그러나 추후 협상을 위한 합의된 원칙을 밝힌 3자 성 명서는 발표되었다.

2000 9월 팔레스타인은 무차별적 테러행위와 폭력 운동을 개시하여 양쪽 모두에 많은 인 명 손실과 고통을 야기했다. 폭력적인 대립을 종식시키고 평화 협상을 재개하려는 수많은 노력은 팔레스타인의 끊이지 않는 테러행위로 인해 좌절되었다.


이스라엘은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2002 6 24일 연설에서 팔레스타인의 테러 중단 을 위해 제시한 비전을 받아들였고, 모든 사안과 평화에 대한 최종 합의안이 그 뒤를 이었 다.

2003 5 25일에 이스라엘은 로드맵을 수용하였고, 이스라엘이 그 실행에 필수적이라고 여기는 의견과 이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겠다는 미국의 약속이 함께 수반되었다. 그러나 아 직까지 팔레스타인은 테러행위와 선동을 무조건적으로 중단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로드 맵의 첫 단계에 따른 의무사항을 실천하지 않고 있다. 이스라엘은 대 테러 방지 조치의 일 환으로 보안장벽을 건설했다.

2005 8월 이스라엘은 5년간 계속된 팔레스타인의 테러로 인한 평화 협상 과정의 답보 상 태를 타개해보고자 사마리아 북부(서안 지구)의 정착지 4곳과 가자 지구에서 군대를 철수시 켰다. 그러나 하마스 정부의 선출 후 팔레스타인의 테러행위는 계속되었으며, 가자 지구에 서 네게브 북부지역을 겨냥한 카삼 미사일 공격과 이스라엘 군인 납치 등의 도발에 이스라 엘은 군사 행동을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스라엘과 시리아: 마드리드 협정의 틀을 토대로 이스라엘과 시리아 대표단의 회담이 워싱 턴에서 시작되었고, 이따금씩 미국 고위급 관료의 참석 하에 양국의 대사급 회담이 열렸다.


1995 12월과 1996 1월 두 차례의 시리아-이스라엘 평화 회담은 안보와 기타 핵심 사안 들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었다. 매우 상세하고 범위 면에서도 포괄적인 이 회담은 향후의 논의와 검토를 위해 개념적 합의와 접근의 주요 영역들을 확인했다. 이스라엘과 시리아 간의 협상은 3년 이상 답보 상태를 보인 후 2000 1월 미국 셰퍼즈타운에서 재개되었다.그러나 이 협상은 돌파구를 이끌어내지 못했고, 2000 3월 제네바에서 클린턴 대통령과 하 페즈 아사드 대통령이 가진 회담도 협상 재개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시리아는 이란과 함께 헤즈볼라나 그 밖의 여러 팔레스타인 테러 단체와 같이 가장 폭력적 이고 위험한 테러 조직들을 지원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레바논: 2000 5 23일 이스라엘은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 결의안 425호를 이 행하겠다는 정부의 결정에 따라 레바논 남부의 안보지대에서 모든 군대의 철수를 완료했다.그러나 불행히도 레바논은 결의안 425호와 결의안 1559(헤즈볼라 해체와 레바논 남부지 역에 레바논 군대 배치를 요구하는 내용)를 아직까지 충실히 따르지 않고 있다. 2006 7월 12일에 헤즈볼라가 이스라엘 군인 2명을 납치하고 이스라엘 북부 도시들을 폭격한 후 또다 시 공격이 이어졌다이에 이스라엘은 레바논 남부에 보루를 구축하고 있던 헤즈볼라 테러 주둔군을 제거하기 위해 군사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이 테러 주둔지는 이란과 시리아가 공급한 수만 개의 대형 로켓포를 보유하고 있었고 수백 만 이스라엘 시민들을 공격 목표로 삼았다. 후에 2차 레바논 전쟁으로 알려진 뒤이은 충돌에서 4천 개가 넘는 로켓포가 이스라엘 내 민간인들을 표적으로 발사되어 44명의 민간인 사상자와 광범위한 민간 기반시 설과 재산 피해를 냈다. 또한 이 전투에서 군사 작전 중 119명의 이스라엘 군인이 사망했다.이 전투는 2006 8 11일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가 결의안 1701호를 채택하면서 끝을 맺 었다. 이 결의안은 납치 군인들의 무조건적 석방을 요구하고, 레바논과 UNIFIL(레바논 주둔 유엔 임시군)이 함께 레바논 남부 전역에 군을 배치하고 레바논 정부 이외의 레바논 민병 단체에 무기 공급을 차단할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다자간 협상

중동지역의 핵심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것을 목표로 하는 다자간 협상은 평화 협상 에서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요소이며, 중동 국가들간 관계 정상화를 촉진하기 위한 신뢰 구축 방안으로 작용한다. 36개 국가와 국제 단체들이 참가한 가운데 1992 1월에 모스크바 다자간 중동 회담이 개최된 후 이곳에 파견된 대표단들은 5개의 실무 그룹으로 나누어 지 역 내 공동 관심분야(환경, 군축 및 지역 안보, 난민, 수자원, 경제 개발)를 구체적으로 다

루었다. 이 실무 그룹들은 중동 내 여러 장소에서 이따금씩 회담을 개최하고 있다.

미국과 러시아의 주재 하에 핵심 대표단의 대표들로 구성된 운영 위원회는 다자간 협상을 조율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2000 9월 팔레스타인의 폭력 사태 이후 다자 회담의 대부분 의 활동이 동결되었다.



역사적 주요사건


기원전

기원전 17~6세기 – 성서 시대

17세기경 아브라함, 이삭, 야곱- 유대 민족의 조상들이 이스라엘 땅에 정착.

               기근으로 인해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로 이주

13세기경 모세가 유대인들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킨 뒤 40년간 사막에서 방랑생활을 함.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포함한 모세 오경을 받음

13~12세기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땅에 정착
1020년경 유대 왕국이 수립되고 사울이 초대 왕이 됨
1000년경 예루살렘이 다윗 왕국의 수도가 됨
960년경 유대민족의 국가적,정신적 중심이 되는 제1성전이 솔로몬왕에 의해 예루살렘에 건축됨

930년경 유다 왕국과 이스라엘 왕국으로 분열

722~720 아시리아에 의해 이스라엘이 함락되고 10개 지파는 흩어짐(사라진10지파)

586 바빌론에 의해 유다가 정복당함. 예루살렘과 제 1성전이 파괴되고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추방당함


 2 성전시대

538~142 페르시아와 그리스 시대

538~515 바벨론으로부터 많은 유대인들이 귀환하고 성전이 재건됨
332 이스라엘 땅이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되고 그리스의 지배가 시작

166~160 마카비(하스몬가)가 유대교 행사 금지와 성전 모독에 항거하여 반란을 일으킴

142~129 하스몬가의 통치 하에 유대인의 자치권 획득

129~63 하스몬왕조의지배하에유대인독립63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 점령



기원전 63~서기 313년. 로마의 지배

기원전 63~4.   로마의 분봉왕 헤롯이 이스라엘 땅을 통치.  예루살렘 성전이 개조됨


기원후(CE) – 서력 기원

20~33년경 나사렛 예수의 사역

66. 유대인 로마에 항거
70. 
예루살렘과 제 2성전의 파괴
73 
마사다에서 유대인 최후 항전

132~135 바르 코크바가 로마에 항거하여 반란을 일으킴



210년경. 유대교 구전 율법(미쉬나)의 성문화 완료

313~636 비잔틴 지배

390년경  미쉬나의 주해서(예루살렘 탈무드) 완성

614 페르시아의 침공 

636~1099 아랍 지배

691 칼리프 압둘 말리크가 예루살렘의 제 1,2 성전이 있던 자리에 바위의 돔 사원 건설

1099~1291 십자군의 통치(예루살렘 라틴 왕국) 1291~1516 마믈루크 지배
1517~1917 오스만 제국 지배

1564 유대 법전(슐한 아루크) 편찬
1860 예루살렘 구도시 외곽에 최초의 교외 거주지 건설
1882~1903  1차 알리야(대규모 이민)가 주로 러시아에서 온 유대인들로 이루어짐

1897 테오도르 헤르쩰이 스위스 바젤에서 제 1차 시온주의 총회 개최 시온주의 기구 설립

1904~14  2차 알리야 (주로 러시아와 폴란드로부터)

1909 최초의 키부츠인 드가니아와 최초의 근대 유대인 도시 텔아비브가 건설됨

1917 영국의 정복으로 400년간의 오스만 제국 지배가 종식됨
         영국 외무장관 밸푸어 경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조국” 
건설을 지지한다고 선언

1918~48 영국의 통치

1919~23  3차 알리야 (주로 러시아로부터)

1920  히스타드룻 (노동 총연맹)와 하가나(유대인 자위 조직) 창설 

          유대 공동체(이슈브)가 정책 실행을 위해 바아드 레우미(민족 평의)를 설립

1921  최초의 모샤브(촌락 공동체) 나할랄 설립

1922  대영제국이 국제연맹으로부터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땅)에 대한 위임 통치권을 받고, 

         통치령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땅에 트랜스요르단을 세움. 나머지 4분의 1이 유대 민족의 본거지가 됨.

         위임 통치 당국에 대하여 유대인 공동체를 대표하는 유대인 기구가 설립됨

1924 최초의 공과 대학 테크니온이 하이파에 설립됨

1924~32  4차 알리야 (주로 폴란드로부터)
1925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이 스코푸스산에 세워짐1929 헤브론에서 아랍 폭도들이 유대인 학살
1931 유대인지하조직에쩰창설

1933~39  5차 알리야 (주로 독일에서)
1936~39 
아랍 테러리스트들의 반 유대 폭동
1939 영국 백서로 유대인의 이민이 엄격히 제한됨

1939~45 2차세계대전:유럽내유대인대학살

1940~41 지하운동조직 레히창설 하가나의 타격부대인 팔마흐가 구성됨

1944 영국군내에 유대인 여단 조직

1947  유엔이 이스라엘에 각각 아랍과 유대 국가를 건립할 것을 제안

1948  이스라엘 건국

1948 영국의 위임 통치 종료(5 14이스라엘 건국 선포(5 14아랍 5개국 이스라엘 침공(5 15)

         이스라엘 방위군(IDF) 조직 독립 전쟁(1948 5 ~ 1949 7)

1949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과 휴전 협정 조인 예루살렘이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통치권으로 양분됨

         초대 크네세트(의회) 선출 이스라엘이 유엔의 59번째 회원국으로 가입

1948~52 유럽과 여러 아랍국가에서 대규모 이민

1956 시나이 분쟁
1961~62 아돌프 아이히만이 홀로코스트에 대한 책임으로 이스라엘에서 재판 후 사형에 처해짐

1964 국립 수로가 완공되어 북쪽의 갈릴리 호수에서 비가 적은 남부로 물 수송

1967 6일 전쟁, 예루살렘 재통합

1968~70 이스라엘에 대한 이집트의 소모전
1973 욤키푸르전쟁
1975 이스라엘이 유럽 공동 시장의 준회원국이 됨
1977 의회 총선에 이어 리쿠드당이 내각을 구성, 30년간의 노동당 집권 종료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의 예루살렘 방문

1978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 중동지역의 포괄적 평화를 위한 기본 틀과 팔레스타인의 자치에 대한 제안을 포함

1979  이스라엘과 이집트 평화 조약 조인 메나헴 베긴 총리와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 노벨 평화상 수상

1981  이스라엘 공군이 이라크 원자로를 가동 직전에 폭격

1982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에서 3단계 철수 완료 갈릴리 평화작전으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테러리스트들을 레바논에서 축출함

1984  총선 후 거국 연립내각(리쿠드당과 노동당) 구성 모세 작전, 에티오피아에서 유대인 이주

1985  미국과자유무역협정조인

1987  이스라엘 관할 지역에서 광범위한 폭력행위(인티파다) 시작

1988  리쿠드 내각이 총선에서 승리

1989  이스라엘이 4개조 평화안 제안 구소련에서 유대인의 대규모 이민 시작

1991 걸프전 동안 이라크가 스커드 미사일로 이스라엘 공격 마드리드에서 중동 평화회의 개최

         솔로몬 작전, 에티오피아에서 공수 작전으로 유대인 구출

1992  중국, 인도와 외교 관계 수립 노동당 총수 이츠하크 라빈이 이끄는 새로운 내각 출범

1993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민족의 대표 기구가 된 PLO가 팔레스타인 의 잠정 자치 합의에 대한 원칙 선언에 조인

         (오슬로 협정)

1994  가자 지구와 여리고 지역에서 팔레스타인 자치 이행 교황청과 전면적 외교관계 수립 

          모로코와 튀니지에 사무국 설치 이스라엘-요르단 평화 협정 조인

          이츠하크 라빈 총리, 시몬 페레스 장관, 야세르 아라파트 수반 노 벨 평화상 수상

1995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 자치 확대 이행 팔레스타인 의회 선출

          평화 집회에서 이츠하크 라빈 총리 암살 시몬 페레스 총리직 승계

1996  이스라엘에 대한 아랍 원리주의자들의 테러 확대 분노의 포도 작전, 

          헤즈볼라의 이스라엘 북부 지역 공격에 대한

          보복 공격 오만과 카타르에 무역대표사무소 설치

          베냐민 네타냐후가 총리로 당선되어 리쿠드당 중심의 연정 내각 구성

          텔아비브에 오만의 무역대표사무소 개설

1997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헤브론 의정서 서명

1998  이스라엘 건국 50주년  이스라엘과 PLO가 잠정 협정의 이행 촉진을 위해 와이 리버 협정 에 서명

1999  에후드 바락 (좌파 "하나의 이스라엘" )가 총리로 선출되어 연립 내각 구성 

          이스라엘과 PLO가 샤름 엘 셰이크 협정에 조인

2000  교황 요한바오로2세 방문 레바논 남부 안보지대에서 이스라엘 군대 철수 

          이스라엘이 유엔 서유럽 및 기타 그룹에 가입 폭력행위 재개( 2차 인티파다바라크 총리 사임

2001  아리엘 샤론(리쿠드당)이 총리로 당선, 광범위한 연립내각 구성 샤름 엘 셰이크 진상조사 위원회 보고서

         (미첼 보고서) 발행.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안보 실행 작업안(테넷 휴전안) 발의

         레카밤 제에비 이스라엘 관광성 장관이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 에게 암살됨

2002 팔레스타인의 대규모 테러 공격에 맞서 방패 작전 개시
         서안지구 테러리스트들의 이스라엘 시민 살해를 막기 위해 테러

         방지용 보안 장벽 건설을 시작
         샤론 총리가 의회를 해산시키면서 
2003 1 28일에 새로 선거 를 실시할 것을 주장

2003 아리엘 샤론 총리에 의해 중도 우파 연립 내각 구성 이스라엘이 로드맵을 수용

2005  이스라엘은 불개입 계획을 이행하여 가자 지구의 이스라엘군 주둔 을 종식시킴

2006  샤론 총리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에후드 올메르트가 총리 대행 이됨

           3 28일 총선 후 에후드 올메르트 총리가 카디마당 주도의 새로 운 내각을 구성

          이스라엘은 자국 군인 납치사건 후 가자 지역에서 팔레스타인 테 러리스트들을 상대로 군사 작전 실시

          헤즈볼라의 미사일 공격과 이스라엘 군인 2명 납치사건에 이어

2007.  2차 레바논 전쟁이 발발,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레바논 남 부에서 헤즈볼라의 테러에 대해 군사 작전을 실시

          시몬 페레스가 의회에 의해 대통령으로 당선
          하마스의 가자 지구 무력 장악 후 이스라엘이 가자를 “적지
(hostile territory)”로 선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