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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어진 길 저쪽'/ 권대웅

대구해송 2018. 2. 11. 01:38



박수근 골목안 /1950 년대


      '휘어진 길 저쪽'/ 권대웅

      세월도 이사를 하는가보다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할 시간과 공간을 챙겨
      기쁨과 슬픔, 떠나기 싫은 사랑마저도 챙겨
      거대한 바퀴를 끌고
      어디론가 세월도 이사를 하는가보다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
      기억 속에는 아직도 솜틀집이며 그 옆 이발소며
      이빨을 뽑아 지붕 위로 던지던 기와의 너울들
      마당을 지나 아장아장 툇마루로 걸어오던
      햇빛까지 눈에 선한데

      정작 보이는 것은 다른 시간의 사람들뿐
      저기 부엌이 있던 자리
      지금은 빌라가 들어선 자리
      그 이층 베란다쯤 다락방이 있던 자리
      엄마가 저녁밥 먹으라고 부르는 소리가
      가슴에 초승달처럼 걸려있다.

      몇 년 만에 아기를 업고 돌아온 고모와
      고모를 향해 소리를 지르던 아버지는
      말없이 펌프질을 하던 할머니는
      그 마당 그 식솔과 음성들 그대로 끌고
      모두 어디로 갔을까

      낯설어 더 그리운 골목길을 나오는데
      문득 내 마음속에 허공 하나가 무너지고 있었다
      허공의 담장 너머 저기
      휘어진 골목 맨 끝
      기억의 등불 속에 살아오르는 것들

      오, 그렇게 아프고 아름답게 반짝이며
      살고 있는 것들.



박수근 골목안 /1950 년대



                              조용필/슬픈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