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I Feel Good /James Brown

대구해송 2017. 11. 13. 00:12








I Feel Good - James Brown


Wo! I feel good, I knew that I wouldn't of
I feel good, I knew that I wouldn't of
So good, so good, I got you
Wo! I feel nice, like sugar and spice
I feel nice, like sugar and spice
So nice, so nice, I got you
[Sax, two licks to bridge]
When I hold you in my arms
I know that I can do no wrong
and when I hold you in my arms
My love won't do you no harm
and I feel nice, like sugar and spice
I feel nice, like sugar and spice
So nice, so nice, I got you
[Sax, two licks to bridge]
When I hold you in my arms
I know that I can't do no wrong
and when I hold you in my arms
My love can't do me no harm
and I feel nice, like sugar and spice
I feel nice, like sugar and spice
So nice, so nice, well I got you
Wo! I feel good, I knew that I wouldn't of
I feel good, I knew that I would
So good, so good, 'cause I got you
So good, so good, 'cause I got you
So good, so good, 'cause I got you









James Brown

'소울의 대부'(Godfather of soul)와 펑키 대통령으로 통하는 전설적 흑인 가수 제임스 브라운이 성탄절인 06년 12월25일 73세를 일기로 폐렴으로 사망했다.

외신에 따르면 제임스 브라운은 전날 폐렴 증세가 악화되어 미 조지아주 애틀란타 에모리 크로포드 롱 병원에 입원했으나 이날 새벽 1시45분(현지시각)께 숨진 것으로 나타났다. 제임스 브라운의 오랜 친구인 찰스 보비가 임종을 지켜봤으며, 아직까지 사인은 명확하지 않다고 외신들은 전하고 있다.

제임스 브라운은 미국내에선 엘비스 프레슬리, 밥 딜런에 버금 갈 정도로 유명한 뮤지션이다. 1956년 ‘please please please’로 데뷰한 이후 반세기 동안 소울, 펑크, 리듬앤 블루스(R&B) 분야에서는 독보적인 위치를 점해왔다. 마이클 잭슨의 현란한 춤 사위도 제임스 브라운에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세계적인 히트곡 ‘I feel good’ ‘Sex Machine’ 등을 불렀다.

제임스 브라운은 올해 2월 한국 무대에서 팬을 만났었다. 당시 그는 “나는 한때 광적(狂的)이라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사람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음악에 미쳐 지냈던 것이고요. 제가 세상을 떠나는 날, ‘음악으로 항상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어했던 한 남자’로만 기억된다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며 마치 미래를 예견하는 듯한 말을 했다.

제임스 브라운은 그래미 평생공로상(92년)을 받고, 비틀스, 밥 딜런에 이어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뮤지션’(미국 음악전문지 ‘롤링 스톤’ 선정) 3위에 오르는 등 화려한 말년을 보냈다. 하지만 화려한 말년에 비해 제임스 브라운의 초년 시절은 험난하기만 했다. 조지아주 빈민가에서 태어난 흑인 소년은 구두닦이, 청소부 등을 전전하다 무장강도죄로 수감되기도 했었다.




 



R&B가 주류를 이루던 무렵, 열정적인 가스펠에 기초한 보컬과 복잡한 폴리 리듬, 그리고 거칠 것 없는 창법으로, 주류를 소울(Soul)로 변화시키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소울의 아버지이며, 이 소울을 출발점으로 하여 펑크가 태어나는 데 있어서 그 시발점이 되었던 인물, 또 브레이크 댄스를 대중화시켰으며, 수많은 랩과 힙합에 목소리와 리듬이 샘플링 되고 있는 인물, 그래서 빌보드지에서 지난 40년간 최고의 R&B 뮤지션 중 한사람으로 뽑은 인물이고, 20세기 음악의 역사에 있어 밥 딜런(Bob Dylan)이나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미친 인물이 바로 제임스 브라운이다.

그는 1928년 5월 3일 남부 테네시주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조지아 오거스타에서 키보드, 드럼, 베이스 등을 익히며 성장했다.

50년대 초 바비 버드(Bobby Byrd)와 함께 그의 최초 그룹인 가스펠 그룹을 결성하여 활동을 펼치기 시작한다. 가스펠 그룹임에도 불구하고, R&B에 뮤직에 심취해 R&B 성향의 곡들을 발표하던 그들은 신시내티 킹 레코드의 주목을 받아 1956년 최대의 R&B 히트곡인 "Please Please Please"를 발표,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이후 "Try Me"가 R&B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고, 60년대로 들어서서도 "Good Good Lovin", "Think", "I Don't Mind", "Baby You're Right", "Night Train" 같은 히트곡을 꾸준히 발표한다. 또한 음악적인 접목 또한 끊임없이 시도했는데, 라틴 재즈의 리듬을 변형해서 자신의 음악에 접목시켰고 이러한 시도는 적중해서 대중들에게 점차 인정받기 시작한다. 또한 그는 가수, 댄서들로 구성된 40여명의 제임스 브라운 리뷰를 결성하여 화려하고 극적인 무대 매너를 팬들에게 선사했다. 이를 토대로 제작된, 실황 녹음의 대작이라 일컫는 [Live At The Apollo]와 [James Brown And His Famous Flames Tour The U.S.A.] 앨범은 당시로서는 최고의 쇼맨십을 보여주어 R&B 앨범으로는 유례없이 앨범 차트 2위를 기록하는 등 음악적으로나 상업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1964년 킹 레코드사와의 계약을 무시한 채 [Out Of Sight]를 발표하여 스매쉬 히트를 기록하긴 했지만 1년 동안 보컬 음반 레코딩을 금지 당하는 법적 제재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 앨범은 펑크(Funk)에서 보이는 대부분의 요소를 갖춘 제임스 브라운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앨범이었다. 이 앨범은 백인들에게도 사랑을 받은 그의 최초의 앨범이었다. 6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토속적인 색채가 짙은 리듬 앤 블루스를 추구했던 그는 흑인의 자긍심과 인권을 노래에 담아 흑인 특유의 예술성을 한껏 과시함으로써 그들의 응어리진 마음에 자랑을 심어 주었다. 또한 자신의 앨범 제작 전반에 걸친 일들을 직접 관장하여, 독특하고 열정적인 그만의 음악세계를 펼쳐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제임스 브라운의 그 과격하고 괴팍한 성질 때문에 그와 함께 했던 밴드의 마시오 파커(Maceo Parker), 피 위 엘리스(Pee Wee Ellis), 세인트 클레어 핑크니(St. Clair Pinckney), 기타리스트 지미 놀렌(Jimmy Nolen) 등의 훌륭한 연주자들이 등을 돌리게 되고, 제임스 브라운은 이에 굴하지 않고 새로운 멤버인 켓피시 콜린스(Catish Collins)와 베이시스트 부치 콜린스(Bootsy Collins)를 영입하여 피스 메이커스 (Peacemakers)라는 젊은 밴드를 결성한다. 이들과의 결합으로 인해 그의 음악은 좀 더 하드해진 펑크적인 음악성을 띠게 된다.

70년대 초반, 결별했던 밴드들과 재결합한 그는 70년대 중반까지 계속해서 명성을 떨쳤지만 그 후 제임스 브라운은 점점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슬럼프에 빠지기 시작한다. "Make It Funky"와 같은 히트곡들이 나오기는 했지만 그것은 제임스 브라운 특유의 재기가 빠진 단순한 노래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슬럼프도 잠시, 힙합 음악이 점점 주류의 음악으로 떠오르자, 그는 다시 한번 재기의 날개 짓을 시작하였다. 1980년 락 클럽 순회공연을 통해 재기의 발판을 다지기 시작한 그는 힙합 음악의 선구자 격인 아프리카 밤바타(Afrika Bambaataa)와의 작업을 하는 등 새로움을 추구하였고, 1986년에 "록키"라는 영화의 시리즈 중 네 번째 작품에 삽입된 싱글 "Living In America"를 통해 정상의 자리로 복귀했다. 또한 힙합 뮤지션들이 그의 음성과 비트를 샘플로 자주 쓰게 되면서 그의 음악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며, 재평가를 통하여 소울과 펑크 뿐만 아니라 락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 흑인 음악가로 평가받는 등 최고의 뮤지션으로 격찬을 받았다. 결국 1992년에는 그래미 시상식에서 Special Lifetime Achievement(평생 공로상쯤 되는 상)를 받고
동시에 로큰롤의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영광을 차지했다.

아내와의 불화로 금고형에 처해 2년 간 복역한 후 출소한 그는 1998년 [I'm Back] 이라는 새 앨범을 발표했지만 과거 그의 명성만큼의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화려한 음악경력과 뚜렷한 주관을 지닌 제임스 브라운은 돈독한 신앙심을 바탕으로 인간의 우열을 가리는 세태를 정면으로 반박하였고, 그의 실험적인 음악과 도전 정신은 60년대 후반에는 펑크(Funk)라 불리는 장르의 확립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또한 그가 있었기에 오늘날 이렇듯 풍성하고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발전했음을 생각할 때, 그의 흑인 음악에 있어서의 지위와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