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예수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데도, 당신의 인생이 고단한 이유

대구해송 2017. 6. 25. 15:05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데도, 당신의 인생이 고단한 이유

 

 

전도대상자에게 흔히 말하는 캐치 프레이즈가 생각나는가?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이다.

그래서 신앙의 연륜이 오래된 당신은 세상의 복을 넘치도록 받고 살고 계신가? 아니라면 교회에 백날 다녀봤자 복하고 상관이 없다는 얘길 것이다.

교회에 왔다가 도로 나간 사람들이 천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들이 나가서 교회에 우호적이겠는가?

아니다. 그들은 교회에 나가봤자 복하고 상관이 없다고 입에 침을 튀기며 말하고 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교회에 와서 세상에서 잘되고 부유하며 성공하는 복을 받는 게 확실하다면, 교회가 사람들로 미어터져야 하지 않겠는가?

교회가 그럴 때가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초대교회가 그랬다.

한 번에 삼천 명씩 몰려들었다고 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로마황제가 예수를 믿고 나서, 기독교가 기득권의 종교가 되고나자 그런 일은 사라졌다.

당신만 인생이 고단한 게 아니다. 당신 주변의 교인들을 찬찬히 살펴보라. 당신과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데도 불구하고, 인생이 고단하고 팍팍한 것일까?

그래서 오늘은 그 얘기를 좀 하고 싶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이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사 59:1)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바로 죄로 단절되어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런 얘기를 교회에서 별로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보다는 도리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죄가 용서함을 받아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설교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왔을 것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서 당신이 예수를 구세주로 믿으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며 그간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여서 용서함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뒤가 문제이다. 회개하고 나서 더 이상의 죄를 짓지 않고 있는가?

연약하고 부족하여서 죄를 지었다면, 즉시 이를 깨닫고 전심으로 회개하며 죄와 싸우고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막고 있는 죄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녀가 되어서, 그분이 내려주시는 축복을 한 없이 누리고 살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라면 여전히 죄가 당신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지만, 당신이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왜 그런지 아는가? 교회에서 죄에 대한 가르침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교인들이 죄에 대한 설교를 싫어하기 때문에, 목회자들이 꺼내지도 않는다. 교인들이 싫어하는 설교를 했다가 뒷감당을 무시할 목회자가 몇 명이나 있겠는가?

그래서 당신이 밥 먹듯이 죄를 짓고 있지만, 깨닫지도 못하는 있는 가장 큰 죄를 알려드리겠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12:30,31)

 

죄란 하나님이 싫어하는 생각과 말, 행동과 성품을 총망라하는 단어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가장 큰 명령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고, 둘째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라는 것을 당신도 잘 알고 계실 것이다.

그래서 이 계명을 어긴다면, 당신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죄를 짓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먼저, 당신은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계신가?

그렇다면 그 증거가 무엇인가? 주일성수에 십일조, 각종 교회봉사를 들먹거리고 싶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런 말씀은 성경에 없다.

주일성수라는 말은 사람들이 지어낸 종교용어이고, 십일조는 헌금에 포함해서 의로움과 믿음, 그리고 사랑을 덧붙여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교회건물이나 조직을 유지하는 각종 봉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라는 말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목회자들이 지어낸 말일 뿐이다.

물론 그런 희생적인 신앙행위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좋겠지만, 그런 행위들은 먼저 하나님이 성경에서 콕 집어서 말씀하신 필수적인 것들을 행하고 나서 선택사항으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필수사항을 제쳐놓고 선택사항을 하고 있다면 무지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을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

 

그렇다면 가장 큰 계명인 하나님을 그 무엇보다 사랑하고 계신가?

당신이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고 있다면, 하나님을 만나고 깊고 친밀하게 교제하는 일에 최우선순위를 두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만나는 행위는 무엇인가? 영이신 하나님과 우리의 영혼이 만나는 통로는 기도와 말씀이다. 그래서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고, 깨어서 항상 기도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을 만나는 기도는 자신의 세속적인 욕망을 요청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찾아오시도록 그분의 이름을 부르고 성령의 내주를 간구하며 찬양하고 감사하며 회개하고 경배하는 기도를 말한다.

그런 기도를 쉬지 않고 해야 할 것을 요구하고 계시다. 그래서 당신은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 열정을 바치고 있는가? 아니라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아니다. 아니라고?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고 틈만 나면 설교를 듣고 있다고? 성경지식은 머리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깨달음으로 가슴에 내려와야 한다. 깨달음은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성경말씀으로 하나님을 만나려면 성령이 내주하는 기도를 동반해야 가능하다.

성령과 깊고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사람들은 성령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으로 삶과 영혼을 채워지기에, 항상 구원의 기쁨을 누리며 감사하며 살게 된다.

그러나 우리네 주변에 쉬지 않고 하나님을 부르고 전심으로 성령의 내주를 간구하는 기도의 습관을 보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목회자도 그런 기도에 무지하기 때문에 교인들에게 가르칠 수도 없다.

그래서 겨우 새벽기도회에 나와서 세속적인 욕망을 채우는 기도를 하라고 권면하고 있으니 기가 막히는 일이다.

그래서 당신은 기쁨과 자유, 평안 대신에, 염려, 걱정, 불안, 두려움, 의심, 낙심, 절망 등의 불신앙의 죄를 짓고도 죄인지 알지 못하고 살고 있다.

 

두 번째 계명은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

래서 당신은 그런 삶을 실천하고 계신가? 그렇다면 당신은 가족을 포함해서 이웃과 친지, 당신이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기쁨과 평안을 누리며 살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을 대하는 당신의 마음을 찬찬히 살펴보라.

그들을 향한 당신의 마음은 불쌍히 여김과 자비, 배려, 이해, 친절, 용서로 채워져 있어야 한다.

그러나 미움, 시기, 질투, 교만, 오만, 짜증, 분노, 싸움으로 채워져 있다면, 죄를 받아들여서 죄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예전에 성령께서 귀신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의 특징은 고집이 세고 자기중심적이며, 교만하고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고 말씀하셨다. 귀신은 죄의 덫을 놓고 죄에 걸려들게 하여 불행에 빠져 고통을 주고 생명과 영혼을 사냥하는 놈들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마음 안에 이런 부정적인 생각이 들어오는 데도, 즉시 쫓아내거나 죄를 깨달았다면 즉각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빌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며 회개하지 않고 교회마당을 밟는 이들이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그들의 삶과 영혼이 고단하고 팍팍한 것이다.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죄가 가로막혀 있어서 영혼과 삶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