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Cliff Richard (클리프 리차드)

대구해송 2015. 12. 7. 22:06

Cliff Richard (클리프 리차드)

 


1969년 10월 16일부터 18일. 이 3일은 우리나라의 척박했던 공연 문화와 사회 전반에 걸쳐 하나의 터닝포인트가 된 사건의 시간적 배경이다. '오빠부대'의 원조이며 팝 스타로서는 처음으로 국내에서 자발적인 팬클럽이 탄생했던 클리프 리차드(Cliff Richard)의 3회에 걸친 내한 공연, 그것은 집단적인 행동과 조용한 환호성(지금은 아니지만)의 이율배반적인 분위기로 특징지어지는 한국 공연 문화의 시발점이 되는 계기였다. 시민회관에서 1회, 이대 강당에서 2회의 공연을 가졌던 클리프 라치드의 무대는 콘서트에 대한 이해도가 낮았던 당시로서는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청소년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어두운 교복과 청순한 단발머리를 한 여고생들의 클리프 리차드에 대한 순수한 애정과 헌신적인 몰입은 '울다가 지쳐 기절까지'라는 과장된 신문 기사로 옮겨지면서 공연장의 열기는 기성 세대들에게 일종의 집단적 히스테리이자 광적인 소란으로 비쳐지며 젊은이들에 대한 불안과 불만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클리프 리차드는 4박 5일 동안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만나는 팬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주최측에서 마련한 파티 비용을 본인이 직접 내는 것은 물론 구세군 교회에 가서 불우이웃성금을 내는 선행으로 일간지 사회면을 훈훈하게 장식해 팬들의 비난을 희석시켜 주었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클리프 리차드는 우리나라에서 대중 음악 역사에 있어 전환점을 제시했던 슈퍼스타였다.

1940년 10월 14일 인도의 럭크나우에서 해리 로저 웹(Harry Roger Webb)의 본명으로 태어난 클리프 리차드는 엘비스 프레슬리로부터 영향을 받아 1957년부터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흑인 감성이 풍부했던 엘비스와는 달리 경쾌하고 팝 적인 느낌이 짙은 음악으로 '영국의 로큰롤 황제'로 등극했다. 1963년 비틀스(Beatles)와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가 등장하기 전까지 클리프 리차드는 브리티시 록의 '절대 강자'였으며 그의 음악 세계는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성지(聖地)였다.

1958년 'Move it'으로 시작한 히트 퍼레이드는 1960년대 후반까지 40곡 이상을 영국 인기 차트에 등록시키며 경이로운 행진을 기록했다. 당시 그의 백 밴드 드리프터스(Drifters)는 미국의 리듬 앤 블루스 보컬 그룹('Stand by me'를 부른 Ben E. King이 멤버였던)과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섀도우스(Shadows)로 바꾸었다.

그의 인기가 치솟자 영화 관계자들은 , , 처럼 젊은이들을 소재로 한 상업적인 영화에 출연시켜 비상(飛上)하는 클리프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국내에서도 'Living doll', 'Visions', 'Constantly', 'Summer holiday', 'Congratulations', 그리고 그 유명한 'The young ones'등이 확실하게 인기를 주도했다.

하지만 이것은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 한정된 반숙(半熟)의 인기였다. 대서양 건너편 미국에서는 물이 끓지도 않았다. 'Living doll(30위)'과 'Lucky lips(62위)', 'It's all in the game(25위)', 'Bachelor boy(99위)', 'I'm the only one(92위)', 그리고 생일 축하 곡으로 세계를 평정한 'Congratulations(99위)' 만이 1960년대 동안 빌보드 싱글 차트에 올랐을 뿐이다. 데뷔곡 'Move it'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노래들은 너무 소녀 취향이었으며 시기상으로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스라는 팝 역사상 가장 위대한 뮤지션들 사이에서 샌드위치 마크를 당했기 때문에 틈새 시장을 확보하지 못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내한 공연을 가졌던 1960년대 후반에 그의 지지도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1960년대 미국 음악계를 침공한 브리티시 인베이션의 명단에서 제외되었던 클리프 리차드는 미국 진출의 꿈을 접었다. 그러나 1970년대 초반에 자신의 백 보컬리스트 출신의 올리비아 뉴튼 존(Olivia Newton John)이 미국에서 대대적인 성공하자 이것에 고무된 클리프는 미국 진출의 꿈을 이루기 위해 서서히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미국인의 구미에 맞는 노래들로 북미 시장을 두드렸다. 1976년에 공개된 디스코 풍의 'Devil woman(6위)'이 처음으로 빌보드 싱글 차트 탑 텐에 올랐고 1980년대 초반까지 'We don't talk anymore(7위)', 'Carrie(34위)', 'Dreaming(10위)', 'Little in love(17위)', 'Daddy's home(23위)', 그리고 자신보다 더 유명해진 올리비아 뉴튼 존과 호흡을 맞춘 영화 <제너두>의 삽입곡 'Suddenly(20위)' 같은 성인 취향의 팝 사운드로 두 번째 전성기를 일구었다.

이제는 아주머니들이 된 예전의 소녀 팬들을 위해 현재까지 공연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클리프 리차드는 1995년 영국 왕실로부터 대중 음악계에 미친 공로를 인정받아 기사 작위를 수여 받았다. 국내에서는 지난 1998년에 개봉된 임창정, 고소영이 주연한 영화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의 마지막 장면에 'Early in the morning'이 삽입되어 다시 한번 클리프 리차드 신드롬을 재연했다.

차이코프스키가 “예술 작품이란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소망과 힘이다”라고 했듯이 클리프 리차드의 노래는 우리 부모님 세대가 살아야 했던 어려웠던 시절의 좌절과 아픔을 낭만과 추억으로 승화시킨 희망의 원동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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