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그리움

빗속에서 / 김 은경

대구해송 2023. 7. 24. 20:10

 

빗속에서 -  김 은경

집으로 향하는 성내천길
우산 없이 비를 맞는다 토끼풀과 나란히
비바람에 시시때때 꽃잎과 결별 중인
찔레나무와 나란히
눈 뜨고 잠든 돌멩이와
나란히 나란히

돌아보니 빗속을 이렇게
맨몸으로 걸은 기억이 없다 어느 저녁
피치 못할 소낙비를 맞으며
눈물로 한 사내를 기다린 적 있었으나
불손하게도 인생은 어차피
장마기의 연속이라고 생각한 때 있었으나

빗방울을 생애 단벌로 껴입은
토란잎처럼은 아니었다
황사 비에도 어김없이 제 초록을 키워 가는
청미래 이파리처럼은 아니었다
(슬픔의 연주 방식에도 고수와 하수가 있다니!)

눈 뜬 채 비 맞는
모든 맨몸은 매혹적이다
오디나무의 맨손 사마귀의 맨발
눈 먼 해바라기의 맨얼굴 그리고
나의 맨 처음, 그대
결코 회귀할 수 없는 물고기 같은 말
맨 처음...

몸보다 마음이 먼저 기운 어느 저녁
우연히 마주친 비,
가랑가랑 고저장단을 맞추어 내리는 빗속에서
나는 지금 오롯이 맨몸이다

사선으로 내리는 비가 직립의 한 생애를
둥글게 감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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