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를 대처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 황금률
이웃을 대접하는 신앙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눅 6:31)
이 말씀은 황금률(Golden Rule)이라고 부릅니다. 황금률이라 함은 예수님 말씀 중에 핵심이 되는 산상수훈 또는 산상수훈 말씀 중에서도 핵심이 되는 결론적이요 총체적이며 종합적인 윤리의 기준이며, 장로·목사 고시에도 자주 출제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돌아보면 필자의 어린 시절에는 이웃 간에 참으로 정이 많았습니다, 비록 지금 이 시대와 달리 먹고 자고 입는 문제가 열악한 가운데 삶을 지탱했지만, 이웃 간의 정만은 두텁고 아름다웠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시골에서 벼농사를 제외하고 시금치, 부추, 미나리, 콩나물, 두부 같은 소일거리로 집에서 기르고 만든 것들을 들고 가계에 도움이 되고자 도회지 5일장에 나갑니다. 한 푼이라도 더 벌어 보겠다는 일념으로 장사를 하다가 때를 놓쳐, 날이 저물어 집에 갈 수도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그때 어느 한 집에 들어가서 하룻밤 신세를 부탁하면, 집 주인은 흔쾌히 승낙하며 함께 저녁 식사를 하자고 합니다. 그 집에서는 시장에서 팔다가 남은 것들을 몽땅 팔기도 하고, 하룻밤 신세에 대한 보답으로 집 주인에게 선물을 하기도 합니다.
어쩌다 집 안에서 잔치가 벌어지면 십시일반으로 이웃들이 거들고, 함께 잔치에 참여하여 함께 일을 도우며, 음식은 서로 나눠 먹으면서 함께 깔깔 웃으며 남은 음식은 각자 집으로 돌아가 식구들을 챙깁니다.
그러다 보면 정작 본인은 먹어보지도 못하고, 서로의 아픔을 뒤로 한 채 함께 대접하기를 즐거워하며 지냈던 시절이 추억으로 떠오르는 밤입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정이 많고 이웃에 대한 긍휼을 품으며 실천하는 민족이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을 문맥상으로 보게 되면, 내가 대접을 받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남을 대접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대접하라!”는 말은 곧 “대하라!”는 뜻이기도, 영접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대하느냐, 내가 이웃에 대해 어떻게 처신하며 대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자신의 가족과 재산을 지켜준 다윗을 대접하기 싫어했던 나발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의 최후는 비참했습니다.
반면 주님을 뵙기 위해 뽕나무 위로 올라갔던 세리장 삭개오는 주님께서 자신의 집으로 가겠다는 말씀 한 마디에 즐거워하며 주님을 기쁘게 영접함으로써 천국을 차지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던 사건은, 신앙인이라면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밤이 지나면 곧 십자가 나무 형틀에서 돌아가실 주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을 통해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까지 씻기시면서 그들을 대접했던 주님의 놀라우신 사랑을, 우리 신앙인들은 깨닫고 실천하는 삶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를 대하든지 이웃 간의 관계에 있어, 남을 대하는 마음 곧 배려하는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곧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며, 인격에 대한 기준이 됩니다.
공자께서도 “네 자신에게 하길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다 같은 맥락의 윤리입니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전가하거나 시키지 말라는 뜻입니다.
위 말씀에서 “율법이요 선지자”란, 누구든지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행동하기를 바라는 바대로 다른 사람에게 행동하는 사람은, 적어도 이웃에 대한 사랑의 문제에 있어 율법서와 선지서의 내용을 다 이룬 것이라는 말씀이 아닐까요?
▲코로나바이러스 ⓒpixabay
오늘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인간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불안하게 하시려고 전하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복음 안에서 죄의 대가인 벌에 집중하지 말고, 생각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의 전환,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을 깨달아 비록 죄 많고 나약하고 불완전한 인간들일지라도, 하나님의 창조물인 우리 모두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며, 서로가 인간답게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멸시천대하고 거짓말하며, 험담하고 탐욕을 누리며 갑질하며 죽이는 일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자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형제에게 먼저 바보 혹은 멍청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을 멸시 천대하는 태도입니다. 특히 나만 잘났다고 생각하는 교만과 아집으로 남을 업신여기며 무시하기 시작하면, ‘인간다운 삶’ 은 파괴되고 고통과 불행 속에 허우적거리며 문드러진 삶으로 전략하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겸손한 가운데 서로 ‘화해’ 와 ‘화평’을 구하는 데서 빛을 발합니다. 두 번째로 자신의 욕정과 욕망, 쾌락을 위해 인간을 도구로 이용한다면 ‘인간다움’ 은 파괴될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교만과 탐욕을 극복할 때, 아름다워지며 신앙인으로서의 빛은 더 강렬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요즘 같이 SNS나 유튜브를 통해 헛소문이 난무한 세상에서 자연스레 온갖 유언비어가 떠돈다면, ‘인간다운 삶’ 은 유실되고 사회는 점점 방향 감각을 잃어 혼탁한 세상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의롭고 정직하게 산다는 것은 마음에 거짓 없이 살라는 말인데, 나만 안 다치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의롭고 정직하지 못하게 내뱉는 한 마디 말은 ‘인간다운 삶’을 파괴시킵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서로가 함께 행복하게 살기 위해 ‘의롭고 정직함’을 실천할 때, 본모습을 찾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들은 ‘생각의 전환’으로, 내가 ‘인간다운 대접’을 받으려면 내가 먼저 인간다운 대접을 해 주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도록 모두가 힘써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언어의 폭력은 소외되고 가난하며, 나약하고 별볼 일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권력으로 성도들을 제압하는 일부 목사와 장로들 때문에, 예수님께서 당부하신 주옥같은 말씀들이 교회 안 어느 어두컴컴한 곳에서 빛을 잃어버렸습니다. 주님 오시는 그 날에야 환환 미소를 지으며 나타나려는지….
남을 대접한다는 것은 먼저 자신의 마음이 순수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교만과 탐심을 물리쳐야 하며, 오롯이 정직한 품성과 자비로운 마음으로 자신을 먼저 용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속에 채워져 있는 거짓과 위선, 그리고 교만과 욕심들을 비워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주님께서 우리 신앙인들에게 당부하신 황금률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으며, 세상은 더욱 사랑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은 행복한 사회가 꽃피는 평화의 땅이 되고, 그곳에서 모두 즐거워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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