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는 네덜란드가 ‘마지막 남은 천국’이란 이미지로 포장, 원시 문화로 유럽인을 유혹하며 힐링의 대명사로 신과 자연과 인간이 시공간을 공유하는 이곳…마음 비우고 어슬렁 거리며 걷는 휴식, 오롯이 누리시라
여행사를 운영하는 사람은 여행을 가도 오롯이 휴식을 누리기는 쉽지 않다. 이번엔 큰 맘을 먹고 발리 출장 끝에 2일을 더 붙여 나만을 위한 휴식을 갖기로. 여행사에 근무하는 사람을 보면 일반인들은 오해를 하는데 그 중 하나가 ‘늘 여행만 다녀서 좋겠다’라는 것이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여행사에 있는 사람들은 의외로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
회사원에게 사무실이 일터인 것처럼 여행사 직원들은 여행지는 일터이기 때문에 신경쓸 일들이 많다.그것도
휴일 하루조차 없이 손님들을 모시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온 몸에 피곤과 짜증이 배여 있다. 그래도 손님들
앞에선 웃어야 하고 카메라 셔터를 눌러줘야 한다.
■ 힐링의 대명사가 된 섬
발리가 힐링의 대명사가 된 이야기는 1차 세계대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서구 사람들은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산업화를 비롯한 문명의 진보라는 가치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유럽 부르주아 사이에서는 ‘미개’라고 일컫는 문화를 체험하며 피폐한 정신을 치유하는 여행이 점차 퍼지기 시작할 때였다. 그 당시의 힐링 투어인 셈. 여행 목적지는 주로 태평양 일대의 섬이었다.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로 삼은 네덜란드는 재빠르게 움직였다. 1931년 개최된 파리식민지박람회에서 네덜란드는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 발리섬을 테마로 잡아 꾸몄고, 네덜란드 왕실 선박회사는 발리의 자연, 전통과 예술을 홍보했다. ‘마지막 남은 천국’이라는 이미지로 여행 상품을 개발해 팔기 시작했고, 신선한 광고카피와 낯선 원시 이미지는 유럽인들을 유혹했다.
서구인들이 들이닥치기 전의 발리 모습을 상상해보자. 지금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고갱의 그림, 타히티의 여인들처럼 19세기만 해도 발리 여인들은 상체를 모두 드러내고 살았다. 당시 멕시코 출신의 화가인 미겔 코바루비아스의 그림을 보면 사누르 해변에서 상체를 드러낸 채 머리에 플루메리아 꽃을 꽂고 앉아 있는 발리 여인이 있다. 이런 낯선 원시 이미지는 유럽인을 넘어서 호주, 일본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기 충분했다.
미개한 나라에 대한 제국주의적 시선, 열대 여성에 대한 우월주의는 발리도 비켜가지 못했다. 찰리 채플린은 발리 여인들이 가슴을 드러내고 다닌다는 점 때문에 발리 여행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석유왕 록펠러도 허니문 장소로 발리를 선택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서양인들의 아시아에 대한 동경, 특히 열대 섬나라에 대한 환상은 이상하리만큼 커서 유럽 제국은 20세기 초부터 지배하던 식민지를 관광지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 정부도 당시 식민지였던 발리를 관광지로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패키지 여행을 개발했다. 1924년부터 정기 항로가 개통되자 발리 관광 붐이 일기 시작했다. 찰리 채플린이나 록펠러 같은 유명인들이 발리를 다녀오자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 사이에서 발리 여행이 인기를 끌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셀럽’ 효과가 매우 컸던 모양이다.
휴양지로 부상한 태평양의 작은 열대 섬나라가 힐링의 이미지를 가지게 된 것은 현지 주민들의 뜻이 아닌, 제국주의와 백인남성우월주의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면, 하와이나 타히티, 발리에서 서구의 팝송에 맞춰 엉덩이를 흔들어대는 변질된 전통 춤이 좀 슬프게 느껴진다.
■ 아름다운 바다를 찾는다면
그러거나 말거나 현대인에게 발리는 휴양지다. 섬이니까 당연히 여행자들은 발리에서 바다를 기대한다. 하지만 발리에 처음 오게 되면 하나같이 이런 반응을 보인다. “발리 바다는 별로네!” 보라카이나 몰디브 같은 영롱한 해변을 기대한 여행자들에게 발리 바다는 대체적으로 어둡고 거칠어서 적잖이 실망하게 된다. 특히나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가는 서쪽 해안인 쿠타 해변을 본다면 더더욱.
발리에서 처음 개발됐다는 사누르는 1966년 일본의 전쟁 배상금으로 지은 최초의 고층 빌딩이자 5성급인 발리
비치 호텔이 들어서면서 발리 관광붐의 시작을 알렸던 곳이 바로 사누르 해안이다. 하지만 현실은 기대와 달랐다. 현지 아주머니는 때 묻은 손으로 주물럭거리던 옥수수를 잿더미 위에서 구워서 팔고 각종 쓰레기와 해초가 둥둥 떠다니는 바다에서 아이들은 다이빙을 하며 놀고 있었다.
서양인들이 몰려들어 활기가 넘쳤다던 아름다운 해변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발리
사람들의 맨 얼굴만 거기 있었다. 지금은 주변 섬으로 이동하기 위한 배가 오가는 선착장으로 사용되면서 어촌
마을 특유의 생동감은 남아있다. 꾸밈없는 사누르의 풍경에서 비롯된 나의 실망은 곧 ‘개발된 휴양지’를 기대한 환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 100대명산 (0) | 2020.04.05 |
---|---|
친구들 (0) | 2020.02.28 |
낮이밤이 '베트남 호이안' (0) | 2019.12.01 |
대항해 시대 풍경 간직한 포르투갈 리스본 여행 (0) | 2019.12.01 |
전국 '일몰 명소' 어디? - 두무진, 달빛쌈지공원, 남산타워, 와온해변 (0) | 2019.1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