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예수

믿음을 양으로 측정할 수 있는가?

대구해송 2018. 8. 5. 20:12

  

신자들은 믿음의 양을 측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기독교 역사의 교훈이다. 
신앙을 우리의 마음대로 늘렸다 줄였다 할 수 있는 양으로 인식하는 것은 신앙의 본질에 위배되는 것이다.
신앙은 ‘반응’이다. 
즉, 그것은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이다. 
신앙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우리를 향해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반응이다. 
우리가 우리의 신앙의 양을 측정하기 위해 그것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의 관심의 초점은 하나님에게서 
우리 자신에게로 옮겨진다. 신앙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고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믿음을 늘려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우리의 방법으로 신앙을 증가시키려는 
시도는 위험하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다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7:20). 

이 말씀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활동하실 때 우리가 지극히 작은 반응이라도 보인다면 일단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콘크리트 벽처럼 단단한 우리의 의지에 지극히 작은 균열이 생긴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이용하여 우리에게 
개입하신다. 하나님이 주도하시고 우리가 반응하는 신앙의 과정에서 우리의 역할은 겨자씨처럼 작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것을 사용하셔서 산을 능히 옮기신다.  

신앙은,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루시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즉, 그분이 우리를 온전하고 성숙한 상태로 끌어올리시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는 우리를 산산이 부수고, 우리 삶의 균형과 조화를 깨뜨린다. 


그러나 하나님은 본래 창조에서 의도하셨던 균형과 조화를 회복시켜주기를 원하신다. 

신앙 성장은 우리의 삶이 얼마나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가에 비례한다.  

다시 말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북돋우고 스스로의 기준에 의해 신앙의 양을 측정하는 방법으로는 
흐트러지고 조각난 삶을 통합할 수 없다.

우리의 삶을 회복하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분이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성령님께 마음을 열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대한 통제권을 성령님께 드려야 한다.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분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균형과 조화를 방해하는 큰 장애들 중의 하나는 도덕주의이다. 

도덕주의는 자신의 방법과 노력으로 성숙함에 이르려는 시도이다.
도덕주의자들은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알고 자신을 채찍질하여 행동을 개선하면 자신들이 실제로 
좋아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잘못되었다. 오히려 그들은 더 나쁜 상태로 떨어진다. 우리 인간은 우리의 조각난 
삶을 통합하여 영적인 온전함을 하나님 앞에서 이룰 수 없고, 하나님만 이것을 하실 수 있다. 

기독교 교사는
“영적 생활의 본질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것이지 
 우리가 그분을 위하여 행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창조적 행위이다. 


그것은 목수가 하는 일보다는 예술가가 하는 일에 가깝다.
 
하나님은 예술가이시다. 나는 신령한 생활을 망치로 두드려서 억지로 만들어낼 수 없다. 
나는 하나님이 내 안에서 창조적인 일을 하시도록 기꺼이 내맡겨야 한다. 

그러면 그분은 내 안에서 새 일을 이루실 것이다. 


신령한 생활에 대해 가르치는 사람들은 ‘초연함’을 강조한다. 

성숙한 신앙인은 초연한 태도를 배운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영적 수준을 판단하고 싶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 

그는 자기의 신앙을 자기의 힘으로 이끌고 나가려는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 


초연함을 유지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닥치는 일들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어두운 밤이 찾아와도, 당황스러운 일에 처해도, 

따분하고 지루한 일상이 반복되어도 우리는 이겨낼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런 부정적인 것들까지 이용하셔서 우리를 온전하게 만드시기 때문이다. 

“누가 나의 영적 생활을 책임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중요하다. 만일 내가 책임을 지고 있다면 


나는 불안한 마음 때문에 표적을 구할 것이며, 또한 내게 필요한 만큼의 믿음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초조하게 나의 신앙의 양을 측정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책임을 지고 계시다면 나는 편히 안식을 누릴 수 있다.

이때의 안식은 무감각이나 게으름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오히려 그 안식에는 에너지가 넘친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원히 우리 안에서 역동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기 때문이다.   

신앙의 양을 재지 말라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많은가’ 또는 ‘우리에게 신앙이 얼마나 더 필요한가’라는 문제에 대하여 


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런 문제를 논할 때 실상 우리는 ‘신앙’이 아니라 ‘감정’에 대해 말하기 때문이다. 

신앙을 감정으로 착각하면, 우리는 신앙의 양을 측정한다고 하면서 실상 감정의 양을 측정하게 된다. 

신앙은 감정이 아니다. 신앙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여는 것이다. 


사실 종종 신앙은 아무런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신앙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과 관계가 있지, 

우리가 느끼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내가 신앙의 양을 재기 시작하면 나는 나의 관점에서 그렇게 하게 된다. 

그러면 나는 항상 잘못된 판단을 내리게 된다. 

반면, 내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관심을 쏟고 주의를 기울이면, 

그분이 하시는 일이 더 많이 눈에 보일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요 3:34)고 말한다. 

하나님은 성령을 주시는 데 인색한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성령을 주시되 너무나 풍성하게 부어주신다. 
그러나 자기의 관점에서 자신을 평가하고 측정하는 사람은 이 진리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