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예수

성령은 사람을 비정상이 되게 하지 않는다

대구해송 2018. 5. 21. 07:38

성령은 사람을 비정상이 되게 하지 않는다

전능왕 예수가 ‘열두 군단’도 더 되는 ‘천사’를 불러들였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왕 중 왕’이자 ‘사람 중의 사람’이셨다. 하나님의 아들, 그것도 외아들이신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사람으로 살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일을 하셨다.

사람은 누구나 온전할 수도 완전할 수도 없다. 세상의 모든 사람, 역사상의 모든 사람을 다 모아 놓는다 해도 그런 사람은 없다. 성인이라 하는 사람, 의인이라 하는 사람들을 다 모아 놓아도 마찬가지이고 위인들을 모두 모아 놓는다 해도 다를 건 없다. 단 한 분의 예외가 있을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 그 한 분만이 온전하고 완전한 사람이셨다.

그분은 이미 2천년이나 오래 전에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다가 부활 승천하셨으나 지금도 우리의 마음에 살아 계시니 ‘…사람이셨다’라는 과거형 표현은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니 문제로 삼지 않았으면 한다. 필자가 여기에서 말하려는 것은 ‘사람 중의 사람’, 즉 온전하고 완전한 사람은 오직 그 한 분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왜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에게 사도 바울을 통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니”(빌2:5)라 말씀하셨겠는가. 이유는 다른 데에 있지 않고 그분만이 온전하고 완전한 ‘사람 중의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데에 있다.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거듭 말하거니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분의 자녀가 되었고 따라서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획득하였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표현에는 어폐가 있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自力)으로 예수를 믿게 된 게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된 것이니 믿어진 것이라 해야 옳은 표현이다. 말장난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치적으로 말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니 그분 자신이 곧 하나님이요, 그분의 마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이다. 그런데 필자는 이와는 좀 다르게 생각하고 있다. 하나님의 마음을 온전히 그대로 사람이 지니게 된 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업어치나 메치나 매한가지 아니냐 할 사람도 있을 줄로 알지만, ‘인자(人子)로서의 예수, 즉 그분의 인성에 방점을 찍고자 해서 한 말이다. 그분께서는 사람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이셨다. 하려고만 들면 초인간적 능력을 얼마든지 행할 수 있으셨고, 실제로 거친 풍랑을 보고 명령하여 잠잠하게 했으며 죽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셨다. 그뿐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그보다 더한 일들도 못할 일이 없으셨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사람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 사람으로 살다 사람으로 죽으셔야 했기 때문이다.

그분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셨다. 먹지 않으며 배가 고프고, 채찍을 맞으면 아프며, 죽음의 고통을 앞두고는 고민으로 죽을 지경이 되었다. 심적 고통이 얼마나 컸으면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 기도까지 했겠는가. 그런데 그분께서는 그것으로 마치지 않고,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 기도를 이으셨다.

아버지의 원, 그것은 자신이 십자가상에서 죽는 것이었다. 그렇다. 십자가상에서의 죽음, 그것이 우리 죄인들을 살리려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다. 그분께서는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셨기에 연약한 사람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연약한 사람으로 살다 붙잡힘으로 패배자가 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만약 잡혔던 그 자리에서 그분이 ‘열두 군단’도 더 되는 ‘천사’를 불러들여 칼과 몽치를 들고 온 무리들을 진멸시켰다면 우리의 구원은 있을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분께서 죽지 않으셨다면 부활이 있을 리 없고,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구원 또한 있을 리가 없다.

 

 

성령은 결코 사람을 비정상으로 만들지 않는다

 

예수는 본래 전능의 하나님이시지만 연약한 인간들을 구하려 스스로가 그 연약한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연약한 인간으로 사시다가 연약한 인간으로 죽으셨다. 그런데 정작 인간들은 그 연약함을 조금이라도 면해 보려고 기적을 바라기도 한다. 특별해지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기도 하다.

은사라는 이름을 빌려 병을 고치고, 방언이나 예언을 하고, 할 수만 있다면 손바닥에서 바람이라도 일으키기(掌風)를 바라기도 한다. 물론 성경에도 있는 은사를 매도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필자는 그런 은사를 받았다며 큰 얼굴을 하는 사람들치고 덕을 세우며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게 하는 예를 별로 보지 못했다. 잇속 챙기기가 아니면 명예욕으로 치닫기 일쑤였다. 필자는 병 고치는 은사를 받았다 해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누군가가 스스로를 영적 어머니라며 함께 일하는 자기보다 나이 많은 분에게 반말로 교만의 극치를 보이는 사례를 보기도 했다.

그와 같이 정상이 아닌 사람들을 보고 성령 충만하다 하는 이들도 있는데, 아니다. 성령은 결코 사람을 그처럼 비정상으로 만들지 않는다. 병 고치는 은사나 방언 또는 예언 같은 은사를 받았다면 소금이 되어 녹아짐으로 빛과 향기를 내는 게 옳다. 그런데 그들이 정말 그러고 있는가. 그와는 반대로 그리스도의 빛을 차단하고 향기대신 악취를 풍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필자가 보아 온 경우는 후자에 가깝다.

주위에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덕을 세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지, 아니면 욕심과 교만이 묻어나고 있어 영광을 가리는지를 볼 일이다. 전자라면 안심하고 교제해도 좋지만, 후자라면 경계하여 멀리하거나 잘못된 것이라 지적해 주어야 한다.

성령님의 주된 사역은 믿는 사람들이 병을 고치거나 방언, 예언 같은 것을 하게 하는 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하는 일이다. 환언하면 주 안에서 사람다운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성령의 주된 사역이라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시지만 이 땅에 오셔 ‘사람 중의 사람’으로 사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그것을 피조물인 인간이 정확히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도 용양이 형편없이 부족한데다가 낡아빠지기까지 한 컴퓨터처럼 버벅거리기 일쑤인 필자로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래도 명색이 목사이다 보니, 아니 크리스천이다 보니 기도만은 쉴 수가 없어 하게 되는데, 그럴 때면 자연스럽게 말씀을 묵상하기도 한다.

그렇게 묵상을 해 오던 중 한 동안 생각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거듭 말하지만 머리가 좋지 못한 필자의 생각이다 보니 내세울만한 것은 못된다. 그러나 같이 생각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topic)의 단초 제공은 되리라고 생각한다. 이를 계기로 해서 독자 여러분이 생각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각자 체계적으로 정리해 보는 것도 의미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무엇보다 깨끗할 것임이 틀림없다. 무엇에도 오염되어 있지 않은 심산유곡의 아침 공기처럼, 그리고 미세먼지 하나 없고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처럼 맑고 깨끗하다는 데에 토를 달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 사랑이 어떠한 것이라는 건 모두가 다 잘 아는 일이니 무슨 말을 하여도 사족이 될 것이므로 더 이상의 언급은 생략하겠다. 그분 자체가 사랑의 덩어리인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사랑은 사람의 맑고 깨끗한 마음을 돋을새김(浮彫)해 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야 더 이상 맑을 수도 깨끗할 수도 없으니 이를 사랑과 연계시킨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그러니 이 같은 견해에 대해 필자의 한계라 생각하고 독자 여러분 각자가 체계를 세워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어쨌든 우리의 마음도 그분의 ‘마음’처럼 맑고 깨끗해야 하는데, 그럴 수 없게 하는 것들은 욕심이요, 미움이요, 시기와 질투며, 거짓이다. 그 외에도 분노, 방탕, 낙심, 무절제, 무자비, 중상, 모략 등 말을 하기로 들면 한이 없다. 지금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고 있는 미투(Me Too) 운동의 원인인 음란도 물론 청결한 마음의 주적(主敵)이다.

한 여검사의 용기 있는 폭로로 불거지기 시작한 성추행 사건들, 강원랜드를 위시한 공공기관에서 저질러졌던 부정 취업들,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가 대변해 주는 안전 불감증의 만연, 직장에서의 승진에 능력이나 인성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고, 알랑방귀를 잘 뀌어야 출세를 하는 세상, 정말이지 어느 한 곳인들 성한 데가 없을 만큼 썩어 버린 세상이 되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믿는 우리와는 상관이 없다 할 수 있는가. 바뀐 것은 대통령뿐, 달라진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고 자조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우리는 그에 전혀 책임이 없는가 말이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어깨띠를 둘러야 전도가 되는가

 

예수께서는 믿는 우리를 가리켜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 하셨다. 그리스도의 향기라고도 하셨다. 그런데 소금이 녹아져 이웃의 삶이 맛을 내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 한 빛도 향기도 나지 않는다. 소금이 녹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 빛이 나는 게 아니라 빛의 차단막이 되고, 향기 아닌 악취가 나게 된다.

필자는 예수 그 자체가 사랑의 덩어리라고 전술했다. 하나님께서 사랑이시니 두말하면 잔소리가 된다. 그런데 소금인 우리가 녹아지지 않으면 사랑 또한 빈말이 되고 만다. 앞에서 마음을 깨끗이 할 수 없게 하는 것들을 열거했는데, 그런 것들도 사랑 하나로 다 제거될 수 있다. 소금이 녹아지는 것 같은 자기희생으로 해결된다는 말이다.

성령의 주된 사역은 믿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하는 일이라 전술했는데, 환언하면 소금으로 녹아져 사랑을 이룬다는 말이 된다. 예수님 자체가 사랑덩어리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사랑덩어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을까. 인류의 구원! 그렇다. 그에 대한 열망, 그것이 그 ‘마음’의 중핵이다. 그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그것인데, 더 말해 뭘 하겠는가.

그러니 우리의 마음 또한 인류 구원의 열망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너무 거창한가. 그럼 미약한 인간인 우리 각자에게 맞는 ‘전도’ 또는 ‘선교’로 하자. 이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상 명령이기도 하지 않은가.

맞다. 전도와 선교는 우리 주님의 지상 명령이다. 그러니 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복음 전파에 사력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어깨띠를 두르고 지하철역이나 시장바닥으로 나가서 외치며 돌아다니는 방법으로? 이에 동의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아니면 생업에 소홀한 채 전도에 나선다? 이에도 동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예수께서는 생활의 초점을 복음 전하는 일에 맞추셨는데, 우리도 그리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결과가 아니겠냐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당신 자신이 곧 하나님이시지만, 우리는 그를 믿는 성도로, 그의 친구이기는 하지만 그분과 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수 그분은 온전하고 완전한 사람이시니 복음 선포와 전파만이 사역이셨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의 덩어리가 아니라 허물과 죄의 덩어리이니 그럴 수가 없다. 그러니 우리의 복음 전파는 각자 스스로의 사람 만들기와 병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입으로 또는 문서나 다른 방법들로 하는 전도가 모자라서 기독교가 쇠퇴의 길을 걷고 있는가. 아니지 않는가. 기독교가 기독교 본연의 자세를 잃어 가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말이다.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잃어 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기독교가 개독교로, 목사가 먹사로 불리고 있는데, 입으로 하는 전도가 먹히겠는가. 가장 효과적인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이다. 그 마음을 그대로 품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 조금씩, 조금씩 품어 가는 것이다. ‘사람 중의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이라는 말이다. 장황해져 미안하지만,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 전도의 지름길이라는 말이다. 그뿐 아니라 그것이 진정한 예배요 산제사가 된다. 일상이 예배요 산제사가 되지 않으면 교회에서의 예배나 가정예배 등의 형식을 갖춰 드리는 예배는 한갓 종교적 의식에 불과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명심하여 노력하여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다는 것, ‘사람 중의 사람’을 본받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니 성령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성령의 주된 사역은 주 안에서 우리를 사람이 되게 하는 일이 된다. 성령 충만한 사람이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인격체로 변화되어 가는 사람이라는 말과도 같다.

성령은 사람들로 하여금 결코 장풍을 일으키거나 입에서 오토바이 소리를 내게 하는 것 같은 일을 하지 않는다.

 


 임종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