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의 단절로 인해 기독교가 잃어버린 것들
인간의 생각이 가미된 인본주의에 의하여 하나님과 단절되면서 기독교는 그 정체성을 잃어버렸다. 또한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도 잃어버렸다. 가장 심각한 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무엇인지를 모르게 되었다는 것이고, 더 나아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기독교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모든 주제에 대한 해답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1. 잃어버린 것 1 - 인간의 정체성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되기 전의 기독교 탄압은 절정에 다다랐고 상상을 불허했다. 온갖 고문을 하고 굶주린 사자 굴에 던져 넣는 그때, 예수를 믿는 자는 사자밥이 되었다. 외부에서 볼 때 기독교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기독교인들과 같이 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사자 굴에 들어가는 환경에서도 기독교 인구가 늘어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만났고 하나님의 능력을 매일 경험하면서 살았다. 인생의 전부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이 진리가 들불처럼 번져 상상을 불허하는 박해 속에서도 기독교의 부흥이 일어난 것이다. 하나뿐인 목숨을 던지는 그 현장에서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고 왜 하나님이 인생의 목적과 목표여야 하는지를 생각할 수 있는 긴 여운을 남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에 인본주의가 가미되면서 인생의 전부가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것이라는 인간의 정체성, 즉 인생의 목적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우주의 크기 속에 지구는 점으로도 나타낼 수 없을 정도의 존재이다. 거기에 인간은 논할 수도 없는 존재이다. 우주를 바라보면 오직 우주를 창조한 하나님만이 계신다. 무한한 우주, 영원한 시간 속에 70년, 80년, 100년의 세월에 인간의 생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는 한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전부라는 것을 안다. 사자 굴속에 던져지면서도 사람들은 ‘인생의 전부가 오직 하나님이라는 것’, 이것을 본 것이고 안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에 인본주의가 가미되면서 사자 굴속에서 확인하였던 하나님의 실체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사자 굴에 들어가야만 하나님의 실체를 확인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실체를 확인한 사람들에게서만 나오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모습들을 세상 속의 기독교에서는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속에 있었던 하나님과 함께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신앙이 사라지고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만들어져 더 이상 하나님이 삶의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남게 된 것이다.
2. 잃어버린 것 2 -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
사도행전은 A.D. 30-70년, 보다 길게는 사도 요한이 죽은 때인 A.D. 98년까지의 기록이다. 이때 성도들의 생활은 하나님의 방법에 따른 공동체 생활이었고, 그들은 모두가 하나가 되었던 생활이었다. 그들은 재산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아래 놓았다.(행 4:34-35, 각주참조) 그리고 사도들은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그것을 나누어 주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부족함이 없이 사는 성도들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것도 서두르지 않았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을 그들은 알았고 그 방법을 따랐다. 혹자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서둘렀다고 말하는데 그렇지 않다. 복음을 증거하는 방법을 몰랐을 때에는 지금과 같이 인간적인 생각으로 행하였지만, 그것이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안 뒤에는 인간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대로 행하였음을 바울서신에서 발견할 수 있다.
“32 그 사람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들을 때 어떤 사람들은 비웃고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에 관해서 다시 듣겠다.”고도 하더라. 33 그러므로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더라. 34 그러나 몇몇 사람은 믿고 그에게 가담하였는데 그 중에는 아레오파고 사람 디오누시오도 있었고, 또 다마리라고 하는 여인과 그들과 함께한 다른 사람들도 있더라“(행 17:32-34) [한글킹]
본문의 내용은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데 어떤 사람은 비웃고, 어떤 사람은 나중에 듣겠다고 말하고 몇몇 사람은 가담했다는 기록이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복음을 전하는데 비웃었다는 것은 복음을 지극히 인간적인 방법으로 전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도 몇몇은 그 무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는 것이다. 지금과 똑같다. 복음을 전하면 ‘너희들이나 잘 믿어라.’는 비아냥거림부터 시작해서 나중에 듣겠다고 말하는 것도 지금과 다르지 않다. 초대교회 때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을 몰랐을 때에는 지금과 같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고린도전서에 가면 확연하게 달라진다.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와서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탁월함으로 하지 아니하였노라. 2 이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 외에는 너희 가운데서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연약함과 두려움과 심한 떨림 가운데 있었노라. 4 또 내 말과 내 설교를 설득력 있는 인간의 지혜의 말로 하지 않고 성령과 능력을 나타냄으로 하였으니 5 이는 너희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에 있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함이라.”(고전 2:1-5) [한글킹]
본문에서 바울은 사도행전에서의 모습과는 판이한 모습을 보인다. 우선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 말과 지혜의 탁월함으로 하지 아니하였다.”고 말한다. 이것은 자신의 생각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 말과 내 설교를 설득력 있는 인간의 지혜의 말로 하지 않고 성령과 능력을 나타냄으로 하였고”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연약함과 두려움과 심한 떨림 가운데 있었노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기를 고심한 흔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바울은 지금의 기독교인들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 움직였다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도 사람의 계획으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행하였다는 것이다.(행 16:6, 각주참조) 즉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대교회는 복음의 전파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랐고, 교회도 가정교회 중심이었다. 전도 역시 개인 대 개인을 중심으로 개종이 이루어졌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은 사람들이 공동체를 찾았다. 이런 초대교회의 신앙생활은 생활 속에서 각자의 구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바울이 “저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다.”고 말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빌 4:3, 각주참조)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 하나니은 하나님이 하신 일만 기뻐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다. 인간의 생각으로 하는 것은 어떤 것도 받지 않으신다. 주님께서는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시고 “아버지가 보여주신 것만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요 5:19-20, 각주참조) 이 기록은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증명하는 구절이다. 인간의 계획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너희가 계획을 할지라도 그 발걸음을 인도하는 이는 하나님이시라.”(잠 16:9, 각주참조)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홀로 서리라”(잠 19:21, 각주참조) 사람이 계획을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였을 때 인도하신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만이 홀로 선다는 것을 잠언은 기록하고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한 가지를 보기로 한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육의 사람이 아닌 영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즉, 성령의 인침을 받고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거듭난 후에 하나님의 계시로 배워서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하고 하나님과 의사소통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성령님의 명령에 따라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영의 사람이 되기 위한 일련의 과정들이 있게 되는데, 이런 과정들이 인간의 생각으로 될 수 있는가? 영의 사람,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인간의 노력으로 가능한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육은 육일뿐이다.(요 6:63, 각주참조) 인간의 노력으로는 영의 사람이 될 수 없다. 영의 사람이 되는 것은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도 불가능하며 하나님이 하셔야만 가능하다. 하나님께서 새 영을 부어주셔서 우리 속에 있는 죽은 영을 살리시고(겔 36:26, 각주참조)그 영의 감각을 깨워서 성령님의 음성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해 주셔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 즉 영의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셔야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을 만드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시고, 만나주시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고, 가르치시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고, 사명도 하나님이 주시고, 그 사명을 완수하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이시다. 영의 사람을 만들기 위한 회개, 믿음, 거듭남도 모두 하나님이 하신다. 이해가 되는가?
신앙에서 인간이 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 인간의 의지를 드리는 것 외에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성경적인 생활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하나님에서 비롯되어 하나님으로 마무리된다. 그 중심에 인간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의 노력으로, 즉 행위로 하나님 앞에 서려고 시도하는 율법주의가 나타나게 되고 자신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인본주의가 있게 된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삼는 기복신앙이 된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어야 가능하다는 결론에 달하게 되었다. 이 인격적인 관계의 형성에서 신앙의 모든 것이 시작된다. 한마디로 신앙의 본질을 이때부터 배워나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신앙의 본질로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어떻게 구현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 문제를 가지고 지금까지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 씨름해 왔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은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방법에 있다. 즉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방법을 터득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고백하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실질을 보여주지 못하면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어떻게 연합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 책 11-2. 그리스도와 어떻게 연합할 수 있는가에서 상술하였다.
이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이 인분주의에 의해서 사라졌다. 인본주의에 의한 하나님과의 단절로 인해 세상을 살면서 반드시 알아야 할,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을 잃어버린 것이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을 잃어버린 것은 하나님과 생활하는 방법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제는 아버지의 뜻도 이룰 수 없고, 인간의 생각으로 일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쉼이 없는 인생을 살다가 지옥으로 향하는 길을 가게 된 것이다.
3. 잃어버린 것 3 - 하나님의 계시
기독교의 계시에 대해서 살펴보고 가기로 한다. 신앙은 계시가 전부라는 사실이 인식되어야 한다. 하나님과 사람으로서 만남이 있게 되어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지시를 받게 되는데, 이것이 계시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이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서 가르치시고, 하나님께서 사명을 주시면서 하나님과 함께 그 일을 이루어가는 것이 구원받은 자들의 삶이다. 이 생활은 매일매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르게 된다.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서는 생활인 것이다. 자신의 계획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여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사는 것이다. 성령의 내용이 모두 이렇게 되어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다. 다시 정리하면 기독교의 본질, 구원받은 자들의 생활, 신앙의 본질, 그리스도인의 생활 등으로 언급되는 모든 것의 핵심은 하나님의 계시, 즉 하나님의 음성에 따라 순종하여 행하는 생활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살펴보자. 하나님과 동행을 하다보면 어려운 일에 부딪친다. 그러면 당연히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라고 대답을 하신다. 그 응답에 따라 일을 처리한다. 이제 이 방식이 어떤 방식인지 이해가 될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방식이다. 내가 지금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한다면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과 사람 대 사람, 즉 인격 대 인격으로 만나고 난 후에 이루어지는 교제, 그리고 이때 듣는 하나님의 음성, 계시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생활은 성경이 생활의 지침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가 생활의 지침이 된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나누셨던 대화는 하나님이 인간과 나누셨던 대화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과 만나 교제가 시작되면 이와 같은 대화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잘하면 칭찬을 듣기도 하고 잘못하면 꾸지람을 듣기도 한다. 어떤 일을 놓고 질문을 하면 대답도 하시고, 경우에 따라서는 권면도 하신다. 어떤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실 때는 불쾌한 감정을 나타내시기도 하신다. 이렇게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활 가운데 드러나는 하나님의 의사표시, 하나님의 음성, 이것이 곧 계시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단절된 지금의 기독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의 계시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없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이 있을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지금의 교회생활은 성경에서 말하는 기독교가 아닌 죽은 신앙이라는 것이고, 흉내만 내는 기독교, 가짜 기독교라고 말하는 것이다.
“10 그러므로 너는 주 너의 하나님의 음성에 복종하고 내가 오늘날 너에게 명령하는 그분의 계명들과 그분의 규례들을 행하라.” 하더라“(신 27:10) [한글킹]
10 You shall therefore obey the voice of the LORD your God, keeping his commandments and his statutes, which I command you today. (Dt 27:10, ESV)
본문을 잘 보라. “주 너의 하나님의 음성에 복종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에 복종하라는 것이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지금 기독교의 문제는 기독교의 본질인 하나님과의 동행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는데 있다. 다시 말해서 동행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하나님과의 교제,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과의 의사소통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기본적인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종교로 전락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이유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에 있다고 본다. 기독교의 탈선은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를 비아냥거리면서 비난하는 ‘기독교가 세상과 뭐가 다르냐?’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게 된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 다른 것이 없는 그리스도인, 오히려 세상 사람보다 못한 그리스도인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겠는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생활방식을 취하면서, 즉 자기생각과 자기 계획, 자기 노력으로 먹고 살면서 뭐가 세상과 다르냐는 것이다. 지금 기독교는 이것을 증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에서는 이 점이 세상과 달랐다. 초대교회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음성에 따라 움직였고,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것으로 살았지만 지금은 자기의 생각에 의해서 움직이고 자신의 노력으로 세상을 산다.
지금 기독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다. 바울이 보여주었던 신앙의 진수, 즉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계시로 배우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 보이지 않는 영의 인도를 따라 생활하는 그 생활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생활을 보여주지 못하는 한 기독교를 향한 세상의 빈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향해서 “우리는 너희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을(약 2:17, 각주참조) 바울은 강조한다. 여기서 행함은 자기 생각에 의한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명령에 복종하여 행할 때 나타나는 결과, 즉 하나님이 일하신 흔적을 말하는 것이다.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이고(엡 2:8, 각주참조)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는 것을 안다면, 신앙생활도 인간의 생각에 의한 계획이나 행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신앙생활에서 인간의 생각에 의한 행위들은 제거해야 한다. 신앙생활은 종교적인 선행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 즉 하나님의 계획을 이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선행이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계획을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출애굽 사건의 중심에 모세가 서서 그 일을 행하였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어떤 일을 행하는 행함이 곧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선행이라는 것이다.
지금 교회의 실패는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단절된 데에 그 원인이 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하나님과 함께 하였는데 초대교회 성도들이 하나님과 함께 하였던 방법을 지금 기독교는 잃어버린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계시, 즉 음성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보이지 않는 영의 인도함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성경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영의 실재를 만나는 것, 즉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듯이, 바울이 하나님을 만났듯이 직접 하나님을 만나는 것임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람이 사람을 만나듯이 인격 대 인격으로 직접 만나는 인격적인 만남이 신앙생활의 시작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만남이 있다는 것조차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교회에는 초대교회의 모습인 가정교회의 모습도 사라져버렸고 각 개인의 구원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 초대교회에 있었던 신앙의 방법들이 없어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단절되었고 기독교가 종교로 전락되어버린 것이다.
4. 잃어버린 것 4 -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
기독교가 변질되기 시작한 것은 사도행전이 28장으로 끝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즉 사도 시대가 끝나면서부터 기독교가 본래 모습을 잃고 변질되기 시작하였지만, 본격적으로 변질되기 시작한 때는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된 이후 초대교회에 있었던 유대적 유산이 파괴되면서부터이다. 여기서 기독교에서 유대적 유산이 사라지면 구원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구원의 시작이 예수님으로부터 비롯되는데, 예수님이 유대인이었다는 사실과 주님께서 유대 풍습을 지키셨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예수님이 인정하고 함께하신 유대적 풍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 초대교회 시대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유대인들, 즉 메시아닉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인정하신 유대적 전통에 한하여 그대로 수용하였다. 다시 말해서 유대 전통이 초대교회의 뿌리였다는 것이다. 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황제가 하나님에 대한 열심으로 유대적요소를 인위적으로 배제하면서 하나님과의 단절을 가져온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생활하는 방법을 모르는 황제가 인간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나서면서부터 하나님과의 단절이 본격화되었다는 것이다. 인본주의의 시작인 셈이다.
4-1. 유대인의 절기
예수님께서 지키신 절기는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이었다. 어린 예수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방문한 기록이 있고,(눅 2:41-43, 각주참조) 최후의 만찬을 유월절에 행하신 기록이 있다.(마 26:29, 각주참조) 주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마 5:17, 각주참조) 주님께서는 유대인의 풍습 속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게 하셨다. 이 풍습을 교회에서 몰아내려는 시도가 니케아 공의회A.D. 325 때부터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서 노골화된다. 그는 니케아 공의회 후에 주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교회가 유대인의 풍습을 따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한다.(각주참조) 그리고 “유월절을 지키는 불법을 바로잡아야 하고 주님을 반역한 자들, 주님을 살해한 자들과 우리 사이에 더 이상 공통점이 없게 만들어야 한다.”(각주참조)고 강조한다. 이렇게 유대의 풍습을 따르는 자들을 처벌하고 교회에서 유대인의 풍습을 몰아내기 위한 작업들이 계속되었다.
A.D. 345년, 안디옥 공의회에서는 “유대인의 유월절을 지키는 자가 있다면 그가 주교든, 장로든, 부제든 간에 그들의 지위를 박탈하고 그들을 교회로부터 파문하고 저주(아나케마)할 것이다. 그들과 연락을 취하는 자들도 지위를 박탈할 것이다.”(각주참조)는 것을 공포한다.
A.D. 365년, 라오디게아 공의회에서는 “유대인들의 만찬에 참석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그들과 만찬을 주최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안식일을 쉬어서는 안 되고 그날에는 일을 하여야 한다. 그리고 누구나 유대주의자라는 것이 발견되면 파문할 것”(각주참조)을 공포한다.
이러한 지속적인 노력으로 유대인의 풍습을 교회에서 잘라냈고 그 자리에 이교도의 풍습을 대신하여 채워 넣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크리스마스이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여 지켰던 축제는 1월 6일 Epiphany day, 즉 주현절이었다.(각주참조) 이날을 로마인들이 축제로 즐겼던 미트라 탄생일인 12월 25일로 선포한다. 주현절이 사라지고 크리스마스가 된 것이다.(각주참조) 아루렐리우스 황제는 274년 미트라 탄생일을 로마의 국경일로 지정했다.(각주참조) 그 농신제農神祭: Saturnalia가 예수님 탄생일로 변한 것이다. 황제는 기독교로 개정하였지만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고 여전히 태양을 숭배하는 이교도였던 것이다. 321년 그리스도인들이 예배하는 주의 첫 날을 공휴일로 지정하였는데 이날을 그리스도의 날이라고 하지 않고 “태양을 숭배하는 날”이라고 불러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일요일, ‘Sunday’의 기원이 되었다.(각주참조)
초대교회에서 주님의 부활은 모든 주의 날, 주일에 기념하였다. 지금 1년에 한 번 특별히 지키는 부활 주일은 오늘날까지도 그 날짜에 대해서 전체적인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유월절을 중심으로 지내야 한다는 주장과 주일날로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 대립되고 있기 때문이다.(각주참조) 그리고 부활절은 달걀을 장식하고 선물로 나누어 주며 즐겼던, 고대 이교도들이 풍요의 여신인 이스터의 날Easter day로 바꿨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풍요의 여신인 이스터Easter의 날로 변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부활Resurrection’이 아니라 ‘이스터Easter’가 된 것이다. 부활절을 Easter로 부르는 것은 지금도 그 이름이 바뀌지 않고 그대로 영어권에서 사용되고 있다.
주님이 활동하셨을 때의 절기는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원히 지키라고 명령하신 절기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하신 것만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과 상의해서 하나님이 동의하신 것을 제외하고 인간이 만든 것은 어떤 것도 취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지금의 절기인 부활절이라든가, 추수감사절, 성탄절은 하나님과 무관하게 인간들이 만들고 즐기는 절기이기 때문에 기독교와는 무관하다. 굳이 부활절을 고집한다면 유월절을 중심으로 무교절 기간 내에 지켜져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유월절에 하셨고, 만찬 이후에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이 무교절 기간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추수감사절은 유대인들이 지키는 초막절 기간에 초막절과 같이 지켜야 할 것이고, 크리스마스는 폐지되고 1월 6일 주현절Epiphany day로 지켜져야 할 것이다. 지금 지키는 사순절Lent은 오순절Shavot로 바뀌어야 한다.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이교도의 사상과 문화가 기독교화 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면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유대인의 풍습이 복구되어야 그 다음 단계로 진입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4-2. 하나님을 잊지 않는다는 것과 함께 하는 것
유대인의 풍습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잊지 않는 것’과 ‘함께 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이다. 절기를 지키며 하나님을 잊지 않는 것은 항상 가능할 수도 있다.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을 잊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사정이 풀리면 아버지를 모셔야지’라는 생각으로 자식들은 아버지를 항상 생각하며 아버지를 잊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함께 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절기를 만드신 취지대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절기들을 지키며 하나님을 잊지 않는 것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은 하나님과 대면한 사람만이 가능하기 때문에 다르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절기와 그 외의 율법들을 지키며 하나님을 잊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고 있다. 만약, 하나님과 함께 하였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모세는 애굽에서 고생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한 구원자임이 분명하다. 물론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하셨지만, 하나님의 일의 중심에 서서 하나님의 계획을 모세가 감당한 것은 사실이라는 것이다. 모세는 예수님의 모형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도탄에 빠진지 400년이 지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보내신 것처럼 말라기 선지자를 마지막으로 400년이 지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이었다면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영의 가르침과 능력, 믿는 자의 표적이 그분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였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하나님과 함께 하였다면 예수님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생활의 전통을 가지고 하나님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민족은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알았고, 그 하나님을 경험한 조상들의 이야기를 구전으로 전해 들으면서 하나님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조상이 경험한 하나님과 함께함이 어느 시점에서 끊어진 것이다. 그리고 절기를 통해서 하나님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하나님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과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것은 다르다는 것이다. 지금의 기독교 역시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을 잊지 않고 있지만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교회 안의 모든 시스템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에 따를 때에만 함께 하신다. 이것이 성경의 원리이고 영의 원리이다.
인간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하나님과의 교제 방법을 잃어버린 인간에게 하나님께서는 한 민족을 부르시어 하나님과 소통하는 방법을 가르치셨는데, 그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이다. 하나님과 소통을 하고자 한다면 저들의 생활풍습 가운데 녹아져 있는 하나님의 의중을 알아야 할 것이고, 그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방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회복시리즈 07 영의 원리 中 일부 발췌 / 박찬빈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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