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는 혼란의 시대를 어떻게 살까?
성도는 혼란의 시대를 어떻게 살까?
“신앙 삶을 산다.” 이것은 갈릴리 출신 예수님(人子: Son of man)을 하나님의 아들(神子: Son of God) 그리스도와 구원자(救援者: Savior)로 믿고 그를 개인의 주(主: Lord)로 신뢰하며 사는 기독교적 삶을 뜻한다. 즉 예수라는 인자를 신자로 믿고 신뢰하는 삶을 뜻한다. 예수님을 인자나 신자 중 어느 하나로 치우쳐 믿는 것은 이미 성경적이 아니다.
이렇게 신앙 삶 자체가 요구하는 균형과 조화에 따라 행하고 사는 것이 바로 하늘이 준 지혜이다(마16:16-17절). 예수님을 구주(Savior)로 영접하고 주(Lord)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신자는 눈에 보이는 세상 나라만 아니라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된다. 세상 나라의 지혜 위에 하나님 나라의 지혜가 더해진다. 비로소 신자에게 지혜로운 삶이 가능하다.
두 문화를 비교하고 대조할 수 있다면 두 문화를 더 깊고 넓게 알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문화를 체험하지 못한다면 자기가 속한 문화도 제대로 알 수 없다. 마찬 가지로 신자가 하나님 나라를 배운다면 세상 나라를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이 덕분에 신자는 지혜로운 삶이 가능하다. 우물 안 개구리의 삶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 문제가 생긴다. 세상 나라는 눈에 보이는 실체라면 하나님 나라는 눈에 안 보이는 실체이다. 신자들이라도 하나님 나라보다 세상 나라에 더 집착할 수 있다. 신자라도 하늘의 지혜를 잃는다. 번영신학이 비성경적인 이유이다. 번영신학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환원시켜 설명한다.
좋은 믿음의 증거는 많은 헌금으로 드러나고 훌륭한 믿음은 반드시 물질적 형통으로 증명된다고 번영신학은 가르친다. 이를 추종하는 신자들은 보이지 않는 복보다 보이는 물질적 또는 경제적 번영을 기준하여 신자들의 믿음을 판단하려 한다. 그러나 성경은 달리 말한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지 않는다(히 11:3).
성경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보이는 것을 존재케 한 보이지 않는 것을 더 생각하고 바랄 것을 성경은 더 권한다. 그러므로 동일한 장에 기록된 아래 성구는 다르게 해석되어야 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11:1절)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을 바라는 행위와 깊이 관련된다.
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히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다음 성구가 이를 증명한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4:18절) 예수님을 구주와 주로 믿는 행위가 보이는 것 즉 일시적인 것과 관련된다고 주장하는 번영신학은 얼마나 엉터리 신학인가?
신자들은 예수님의 구속 행위(골 1:13-14)로 눈에 보이는 세상 나라로부터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로 시민권을 바꾼 새로운 존재가 아닌가? 중생으로(요 3:1-8) 세상 나라로부터 하나님 나라로 들어간 새로운 피조물이 아닌가? 그리고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은 특별한 존재(엡 1:3)가 아닌가?
어찌 일시적인 복을 받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인가? 그렇게 주장하는 복음은 다른 복음으로 물질을 숭상케 하는 구약 시대의 바알 신앙과 동일하다. 이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 중 세상 나라로 치우친다. 세상 나라는 일시적으로 존재할 것이지만 눈에 직접 보이는 실체이기 때문이다.
번영신학은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 사이 관계에서 균형과 조화를 상실한 비성경적 가르침이다. 번영신학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결국 완전히 사라질 보이는 세상을 영원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어 집착내지 소망하게 만든다. 그럼 성도의 지혜는 어디에 있는가? 사도 바울이 이에 답한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고전 7:29-31)
종말론적 자세는 바로 성도가 추구해야 할 지혜로운 삶이 무엇인가를 잘 설명한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서 이런 지혜로운 삶을 찾기가 쉽지 않다. 번영신학은 물론 양적 교회 성장론은 종말론적 지혜를 결여한다. 목회자나 신자들도 가능한 한 경제적 형통과 양적 또는 외적 성장을 한없이 추구한다. 이들은 사도 바울의 권면과는 정반대로 행한다. 누구보다도 삶에서 자제력을 보여야 할 목회자와 신자들이 절제력이나 자기부정을 전혀 보여주지 못하는 이유이다. 이것은 이미 지혜를 상실한 분명한 증거이다.
그럼 지혜로운 삶은 무엇인가? 아내가 있는 자이지만 없는 자처럼, 우는 자이지만 울지 않는 자같이, 기쁜 자이지만 기쁘지 않은 자처럼 그리고 많은 것을 가졌지만 없는 자같이 행동하며 사는 것이다. 보이는 것에 집착할수록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일시적인 것만 바란다면 영원한 것을 상실할 수 있다.
이런 자세는 성도에게 온당치 못하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 3:1-3)
성도는 하나님 나라와 비교하고 대조한 후 세상 나라가 무엇인지를 잘 안다. 그는 세상 것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삶을 살고 싶지 않다. 그러나 대부분의 목회자와 신자들은 세상 것에 의해 쉽게 휘둘린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를 신학적으로 이들이 잘 모른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아니 이들은 하나님 나라를 전혀 믿지 않는다. 결국 하나님 나라를 위해 대속 죽음을 한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불신한다.
이렇게 번영신학은 성경적인 것처럼 보일 뿐 전혀 비성경적이다. 번영신학과 양적 성장론은 겉으론 하나님 나라를 말하지만 결국 세상 나라를 택하게 만드는 다른 복음이며 거짓 신학이다. 이의 추종자들의 삶과 윤리가 이를 잘 증명한다. 절제와 자제력을 잃은 이들의 신앙 삶은 상식적으로도 추하며 참 천박하다.
그럼 성도를 위한 지혜는 또 어디에서 구할 수 있는가? 사물과 사건은 늘 양면을 보여준다. 흑백 논리에 사로 잡혀 있는 사람들은 흔히 양면을 대립적 이분법으로 해석하며 반대자를 무조건 대적한다. 이 결과 사물과 사건의 다른 면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가 된다. 인체공학이 이를 반대한다.
손, 발, 눈, 귀와 다리는 각각 둘로 오른쪽과 왼쪽에 위치한다. 때때로 이들이 달리 행하는 듯 보이지만 같은 몸에 속하여 항상 몸을 위해 일한다. 위치가 다르다고 틀린 것은 아니다. 다른 위치에서 있기에 다른 것들을 더 보도록 해 좀 더 객관적으로 또는 합리적으로 보도록 돕는다.
우익이나 좌익은 모두 한 몸에 붙어있는 두 날개를 뜻한다. 날기 위해 날개 하나로는 불가능하다. 다른 위치에서 활동하는 날개가 있어야 새는 날 수 있다. 보수와 진보도 마찬가지다. 늘 안정만 추구하면 발전이 없다. 그러나 늘 변화만 추구한다면 사회가 불안하며 무너질 수 있다. 안정과 성장, 성장과 분배, 성장과 균형 등등은 모두 다른 위치에서 사물을 보도록 도울 뿐 늘 동일한 사회를 위한다.
이런 사물의 이치를 상식적으로 잘 이해한다면 우익와 좌익,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 여당과 야당은 적대적 자세를 버리고 타협을 통해 안정과 성장, 성장과 분배 그리고 성장과 균형 사이 정도를 조정할 수 있다. 이렇게 대립적인 이분법이 아닌 논리적 이분법이 사고의 성숙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사물의 이런 이치를 부정하고 무조건 반대하는 것(대립적 이분법)은 지혜가 아니라 어리석음으로 함께 속한 공동체를 무너트리려는 적만이 할 수 있는 짓이다.
사고방식에서 대립적 이분법을 버리고 논리적 이분법을 추구하라! 전자는 적들의 투쟁 방식이라면 후자는 속한 공동체를 진정 사랑하는 이들이 택하는 삶의 지혜이다. 지혜는 전자에 속하는 철학과 사상에 물들지 말라고 경고한다. 지혜는 두 면을 동전의 양면처럼 보며 이들 사이를 전자와 후자 관계로 이해한다. 이것이 논리적 이분법이다.
형식과 내용, 원인과 결과, 원리와 적용, 성장과 분배, 논리와 역사, 신학과 윤리, 믿음과 사랑 등등 이런 논리적 짝들은 주변에 너무나 많다. 이들은 논리적으로 분리될 뿐 실제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논리력에서도 성숙해야 한다. 이들 사이 관계를 전자와 후자로 이해하며 전자를 중심으로 후자도 택할 줄 하는 유연한 논리적 성숙이 필요하다(논리적 이분법).
우리 주변에서 지극히 어리석은 대립적 이분법은 흔하다. 정도, 호감, 규모와 량에 관련된 것들은 상대적 이분법에 속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상대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고 정도의 차이를 갖고 싸운다. 예컨대 키가 크면 좋지만 작으면 나쁘다라는 와모나 규모와 관련된 상대적 이분법이다. 또는 예쁘면 좋고 안 예쁘면 나쁘다는 호감과 관련된 상대적 이분법이다. 량에서도 많을수록 좋고 적을수록 나쁘다라는 상대적 판단은 주변에 비일비재하다.
상대적 이분법을 절대적 이분법으로 보면 대립적 이분법이 되며 사회의 국민 정서 또는 수준은 합리적이지 못해 후진한다. 잘 생겨도 사람이요 못 생겨도 사람이다. 외면적 호감으로 사람 자체를 판단해선 안 된다. 외모, 빈부, 귀천, 성, 나이와 무관하게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동등하기 때문이다. 정도, 호감, 규모와 량에 관련된 상대적 이분법을 대립적 이분법으로 보는 어리석음을 피하는 것이 바로 사고 방식의 성숙이며 지혜이다. 이로써 불필요한 사회적 낭비를 줄일 수 있다.
그리고 지혜로운 삶을 위해 인간적 관점만이 아닌 신적 관점도 소유해야 한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9절) 신적 관점을 가질 수 있다면 폐쇄적 사고에서 개방적 사고를 할 수 있다. 사람은 지역, 관습, 문화 그리고 민족 같은 것들에 쉽게 사고가 묶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창조한 신이다. 하나님의 뜻, 의지, 목적과 계획에 근거를 두고 다르게 보이는 것들을 지혜롭게 판단할 수 있다.
이렇게 보이는 것을 존재케 하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사고 방식이 참으로 지혜롭다. 현상만 보는 사람들은 서둘러 판단하려 한다. 그러나 그 이면을 살피려는 자세는 서투른 판단을 일단 피하도록 도와준다. 그렇게 신자는 사물을 보다 객관적 입장에서 살피려는 진지성과 합리성을 추구할 수 있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런 지혜를 소유한다. 그 소수의 사람들은 신자여야 한다. 신자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마5:13-16절).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면 사람들은 누구나 지혜로운 체 처신하려 한다. 성경이 이에 대해 증언한다. “나라는 죄가 있으면 주관자가 많아져도 명철과 지식 있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장구하게 되느니라”(잠 28:2)
죄가 많은 곳은 늘 시끄럽다. 너도나도 잘 났다고 목소리를 높이기 때문이다. 죄가 많다는 것은 역사의 진정한 주인인 하나님을 불신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사회에서 하나님의 완전한 법치는 불가능하고 인간의 불완전한 덕치만 판 친다.
이미 언급했듯이 논리적 성숙이 결여된 사회도 늘 시끄럽다. 사물의 양면을 생각하지 않고 흑백논리로 싸우기만 좋아한다. 충동질만 잘 하기 때문이다. 이런 지도자들과 정치꾼들은 선거를 통해 철저히 배제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복음 전파만이 인간 사회를 지혜롭게 만들어준다.
그럼 시끄러운 사회에서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말을 조심하라!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전5:1절)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10:19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