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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슬픔 / 강연호

대구해송 2018. 7. 18. 05:54


    건강한 슬픔 / 강연호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랜만이라는 안부를 건넬 틈도 없이 그녀는 문득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그저 침묵했다 한때 그녀가 꿈꾸었던 사람이 있었다 나는 아니었다 나도 그때 한 여자를 원했었다 그녀는 아니었다 그 정도 아는 사이였던 그녀와 나는 그 정도 사이였기에 오래 연락이 없었다 아무 데도 가지 않았는데도 서로 멀리 있었다 전화 저쪽에서 그녀는 오래 울었다 이쪽에서 나는 늦도록 침묵했다 창문 밖에서 귓바퀴를 쫑긋 세운 나뭇잎들이 머리통을 맞댄 채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럴 때 나뭇잎은 나뭇잎끼리 참 내밀해 보였다 저렇게 귀 기울인 나뭇잎과 나뭇잎 사이로 바람과 강물과 세월이 흘러가는 것이리라 그녀의 울음과 내 침묵 사이로도 바람과 강물과 세월은 또 흘러갈 것이었다 그동안을 견딘다는 것에 대해 그녀와 나는 무척 긴 얘기를 나눈 것 같았다 아니 그녀나 나나 아무 얘기도 없이 다만 나뭇잎과 나뭇잎처럼 귀 기울였을 뿐이었다 분명한 사실은 그녀가 나보다는 건강하다는 것 누군가에게 스스럼없이 울음을 건넬 수 있다는 것 슬픔에도 건강이 있다 그녀는 이윽고 전화를 끊었다 그제서야 나는 혼자 깊숙이 울었다



    姜鍊鎬


    충남 대전 출생
    고려대학교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현재 원광대학교 한국어문학부 문예창작학전공 부교수
    1991년 《문예중앙》신인문학상에〈歲寒圖〉외
    아홉 편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
    1995년 현대시동인상을 수상
    시집으로,《비단길》(세계사, 1994)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문학세계사, 1995)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문학동네, 2001) 等



    <감상 & 생각>


    슬픔에도 건강한 것이 있다니...

     

    말없이 흐느끼는 그녀의 전화에서,
    건강한 생명력을 읽어내는 시인의 감각이 부럽다.

    그리고, 활자活字를 빌어 그 슬픔의 수직적 깊이를
    오히려 따뜻한 포옹 같은 감촉으로
    독자에게 살갑게 전해주는 배려配慮도
    고맙게 느껴진다.

    이 황막荒漠한 삶의 한 가운데서
    자신의 내밀內密한 슬픔을
    아무 스스럼없이 받아줄 수 있는 이가
    곁에 있다는 건 얼마나 복된 일이던가.

    건강함은 고사姑捨하고...


    그 어느 누구에게도 전할 수 없는
    말기암末期癌 같은 내 슬픔은
    이제 아무도 받아주는 이 없고,
    심지어 나에게서조차 외면을 당하는데.

    그래서일까.

    곁에 아무도 없단 게...
    오늘따라, 유독惟獨 쓸쓸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