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예수

광야의 함성, 절망과 소망 사이

대구해송 2018. 7. 8. 22:40

광야의 함성, 절망과 소망 사이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그대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그는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그는 광야에서 털옷을 입으며,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 그 분의 삶과 죽음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자신의 삶과 죽음으로 보여준 예언자가 바로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오시기 앞서 하늘나라를 선포하고, 백성들이 회개할 것을 촉구했던 분이며, 그리스도 예수님의 길을 미리 예비하며 철저히 준비하고, 예수님처럼 그 분 역시 의로운 죽음으로 하나님의 기대에 크게 부응했습니다. 그 분의 선포와 죽음은 정의 사회를 구현하는 데 크게 이바지 했습니다. 그는 욕망에 사로잡혔던 당시의 헤롯 왕에 대항한 용기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광야에서 소리쳤듯, 광야는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참으로 특별한 곳입니다. 모세와 아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광야라는 거친 세상을 만나 지나가야 했고, 예수님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에 이끌려 고난의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광야는 인간의 초라한 모습과 두려움, 그리고 공포에 질린 자신을 바라보는 곳입니다. 광야는 인간의 가장 밑바닥에 깔린 탐욕과 더불어 함께해야 하는 곳이고, 유혹과 싸워야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광야는 인간이 침묵과 고독 속에서 깨달음에 이르는 행복하며 평안을 누리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때때로 인간에게 말씀하시며 당부하시는 곳입니다. 광야는 인간이 낮고 낮은 자기 모습을 발견하는 곳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손길을 느끼며 보호와 사랑을 받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 200만명 중에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단 두 명,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조차 가나안에 입성하지 못할 정도로, 광야는 냉혹한 곳이었습니다.

 

지금 한국에 기독교인 숫자가 1천만명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 200만명 중 두 사람만 가나안에 들어갔음을 감안하면, 1200만명 중에서는 6명만이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될까요?

 

오늘날 신앙인들은 광야를 잊고 살거나 광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아픔과 고통을 견디는 것을 마치 어리석은 것으로, 탐욕과 유혹에 맞서 싸우는 일을 의미 없는 삶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고독한 침묵 속에서 수수방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상에서 한걸음 물러나 광야로 가는 것은 시간 낭비라 생각하거나 세상에서 뒤쳐지는 것이라 여기기 때문에, 광야를 거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손길과 보호를 만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광야는 고통스럽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때로는 만나고, 무한하신 사랑을 깨닫는 곳이기도 합니다.

 

거친 광야의 외침은 고통스러운 요청이지만, 동시에 쇄신과 새로움으로 건너가는 요단강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례자 요한의 광야 인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 그의 회개 촉구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오늘 세례 요한은 우리를 광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광야를 통해 우리들의 믿음을 한 단계 더 성숙하게 합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쳤듯이,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광야의 소리가 있어야 합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할 때, 이웃을 위하여 선한 일을 할 때는 고요한 침묵 속에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대의를 위해 또는 많은 이웃을 위해 소리를 내어야 할 때 내지 못하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은 비신앙인들보다 못한 일일 것입니다.

 

신앙인이라면 매주 교회에 나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하면서 시작합니다. 거룩한 공교회, 우리의 삶 속에서 공공성을 얼마나 생각하고 실천하며 살아가는지요. 신앙인으로서 공적 역할은 더욱 요구되지만, 광야의 소리는 사라지고 침묵으로 방조하며 공적 책임을 외면한 행위에 대해 함구해서야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민족에게 숱한 광야를 걷게 하셨지만,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고요한 침묵 속에 눈치만 보고 있습니다. 나 하나의 안일만 추구하는 오늘날 모습들을 보노라면, 진정한 광야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합니다.

 

이 시대의 신앙인들은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우리를 보호해 주었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불평불만 속에서 원망의 함성으로 광야를 괴롭게 하는 것은 아닐까요.

 

이조 말엽 주님의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올 때, 수많은 천주교인들과 개신교인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도 주님의 복음을 위해 숱한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6·25 남침을 통해 공산당에 의해 많은 기독교인들이 피를 흘렸습니다.

 

그들은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해 몸 버려 가며 희생을 감내했습니다. 이 땅에 뿌려질 복음을 위해, 거룩한 사랑의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오로지 자신의 평안을 뒤로 한 채 십자가의 공로만을 위로 삼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지도자들을 포함한 작금의 신앙인들은 너무나 안일한 광야만을 찾고 있는 것 같아 애석하기도 합니다. 정의사회를 구현한답시고 그렇게 외치고 떠들고 반대하던 그들은 평화라는 위장술 앞에서 다 어디로 갔습니까? 그나마 미국은 자국민들을 위한 유해 송환을 단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6·25 전쟁 시, 우리 국군의 포로들과 유해 송환에 대해서는 한 말씀도 없이 함구하고 이유가 무엇인지요?

 

인권을 논하고 세습을 비판하면서, 북한인권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고 북한의 세습에 대해서도 한 마디 언급도 하지 않는 그들은, 이 나라 백성들이 아닌지요? 남북 평화를 논하기 전에 6·25 남침으로 희생됐던 숭고한 우리 민족의 순교자들 앞에 먼저 사죄하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요?

 

그리고 연평해전을 비롯하여 때때로 많은 무장공비를 침투시켜 우리의 선한 백성들을 참혹하게 만든 그 장본인들에게, 언론들은 왜 함구를 하고 있는지요. 대기업 회장 부인이 법정에서 긴 한숨을 쉬는 것은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말입니다. 북한과 정부가 잘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어찌 말 한 마디도 없는지요.

 

이 땅에서 언론인이라 자처하는 그 분들은, 정말 언론인으로서의 양심을 가지고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언론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공명정대하게 국민들을 위해 알 권리를 전달하는 것이 당연한 처사 아닐까요?

 

언론과 종교 지도자들의 비겁한 침묵 때문에 백성들은 귀를 닫아버렸고 눈은 흐려졌습니다. 이는 분명 참사입니다. '언론 실종'과 종교 지도자들의 무사안일 주의가 이 나라의 미래를 더욱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광야의 함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광야의 길은 우리 모두에게 유익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의 길, 그 고난 때문에 우리가 한시라도 더 빨리 목표를 향해 달려갈 수 있습니다. 도리어 '여기서 초막 셋을 짓자'고 안일함을 추구할 때, 교회는 더욱 타락해가는 것입니다.

 

광야의 시험은 우리 주님도 받으셨습니다. 주님께서도 당하셨던 그 광야의 시험이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필히 찾아온다는 점을 명심 또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광야에 꼭 나쁜 것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거친 광야를 통해, 나를 발견할 수 있는 좋은 이점도 있습니다.

 

'왜 나에게만 이런 시련이 찾아오는가?' 라고 한탄만 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무한한 그 사랑을 생각해 보시고 마음 속으로 받아들여, 새로운 광야의 소리를 가슴 깊이 아로새기는 신앙인들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거친 광야는, 절망의 세계에서 오히려 큰 기쁨이 되는 소망의 곳이기도 합니다.

 


▲이효준 은퇴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