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예수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교회의 리더들

대구해송 2018. 1. 30. 05:28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교회의 리더들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교회 리더들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지금의 목회자들을 양성하는 과정과는 사뭇 다르다. 교회 리더들의 소명과 사명에 대해서는 ‘신앙의 본질’에서 거론하였기 때문에 설명을 약하고,(상세한 것은 필자의 책 ⌜신앙의 본질⌟ 03-1. 소명과 사명을 참조하라.) 여기서는 그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리더가 되었는지를 성경의 기록을 통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1. 누구로부터 배웠는가

 

리더는 주님의 지상 사역 가운데 주님으로부터 직접 배웠던 제자들의 경우와 주님이 승천하신 이후에 부름을 받은 바울의 경우로 나누어서 살펴보아야 한다. 지금의 우리는 모두 바울의 모델에 해당된다고 할 것이다. 제자들을 선택한 목적이나 제자들을 양성한 주님의 의도는 열두 제자들의 가르침 속에서 배워야 하겠지만, 주님이 승천하신 이후의 시대에 사는 이방인인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되는 방법에 대해서는 바울이 경험한 그 방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11 그러나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12 나는 그것을 사람에게서 받지도 않았고 배우지도 않았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된 것이라”(갈 1:11~12) [한글킹]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리더는 본문의 내용과 같이, 보이지 않는 주님으로부터 바울이 배웠듯이 그 방법으로 배워야 한다. 본문의 내용이 성경에 기록된 이유는 영적인 리더들이 되는 과정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못 박은 것이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즉 영의 실재를 만났다. 그리고 아라비아로 내려가 3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살아가는 모든 방법을 보이지 않는 주님으로부터 직접 배웠다.(갈 1:17~18, 각주참조) 그 과정 속에서 그는 분명히 성령님과 대화하는 방법을 배웠을 것이고, 영이신 하나님께서 인간들과 어떻게 소통하시는지 그 의사표시에 대해서 배우고 터득하였을 것이다. 주님께서 지상 사역을 하실 때 제자들도 이해하지 못하였던 내용들, 즉 주님만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성부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행하셨던 지상 사역의 내용을 바울은 그때서야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 모두가 그 방법으로 살아야만 한다는 것을 바울은 분명히 터득한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너희도 그 방법으로 배우지 않았느냐.”고 반문한다.(엡 4:21, 각주참조)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이후에 신앙생활에 대하여 어떤 세상적인 혈육으로부터 배우지 않았고, 먼저 된 사도들한테 배우지도 않았다. 오직 보이지 않는 주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배웠다. 따라서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하나님과 같이 모시고 살았던 구약의 선지자들이 어떻게 하나님과 대화하였는가를 알았을 것이고, 예수님께서 지상 사역을 하실 때 어떤 영의 원리에 의해서 어떻게 일하셨는가도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바울은 분명히 보이지 않는 주님으로부터 영적인 방법들을 배웠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제자들이 사역하고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3년 뒤에 베드로를 만나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하고 서로를 신뢰하게 된 것이다. 서로 같은 방법으로 주님과 교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서로를 신뢰하였다는 것은 베드로나 야고보, 요한, 유다 등이 쓴 성경의 내용이 서로 모순되지 않고 복음서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내용과 충돌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상고해야 할 것은 지금 교회의 목회자들이 바울과 같이 주님으로부터 배우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면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가이다. 만약, 그들이 바울의 방법으로 배웠다면 성도들을 향한 가르침에서 그 방법이 묻어나왔을 것이고 그 방법만, 즉 주님을 만나서 교제하고 그로부터 영적인 진리를 배워야 한다는 것만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이 하나도 전수되지 못하고 조정기간, 즉 주님으로부터 배우는 기간이 있다는 것도 파악하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듣는가를 가르치지도 않고, 보이지 않는 영의 실재와 어떻게 동행하는지를 설명하지도 않는 것을 보면, 지금의 목회자들은 영의 실재와 동행하는 것이 아니라 책 속의 하나님을 학문적 이론을 가지고 말하면서 신앙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신앙은 영의 실재와 함께하는 생활이기 때문에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은 결코 남에게 전달할 수 없고 성령님의 기름부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체험을 통해 얻어진 결과이다. 따라서 그들이 만약 보이지 않는 주님으로부터 바울과 같은 방법을 통해서 배웠다면 그 방법이 기름부음을 통해서 성도들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신앙은 삶이고 생활이지 이론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말한다면 바울이 동행했던 주님과 동행해야 할 것이고, 바울과 같이 살아야 할 것이고, 바울과 같이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만 말해야 할 것이다.

 

지금의 목회자들이 말하는 신앙생활은 바울이 말하는 신앙생활과, 즉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신앙생활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들이 리더가 된 과정도 학문적인 배움을 통해서, 신학교를 나오고 인간이 만들어 놓은 절차에 따라서 목회자가 되었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제도의 틀에서 자격증을 취득한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영의 실재를 만나지 못하고, 즉 하나님을 알지 못한 자들이 목회자가 되었고 설교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이 바울과 같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것은 이론뿐이고, 도덕을 말하고 윤리를 말하는 것과 같은 권선징악의 종교적 훈계만 하고 있는 것이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생활인 신앙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영의 실재를 만난 적도 없고, 만나는 방법도 모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도 못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의 생활 속에서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2. 영적인 분별력이 있는가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영의 실재를 알지 못하는 리더들이 영의 세계를 분별할 수 있겠는가? 신앙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다루는 분야이다. 따라서 영적 전쟁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는 자들이 영적 리더들인가를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귀신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는 자들이 영적 리더인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 중 하나는 마귀의 일을 멸하시기 위해서였다.(요일 3:8, 각주참조) 예수님이 제자들을 두신 목적 가운데 하나도 귀신들을 쫓아내기 위한 것이었다.(막 3:13, 각주참조) 이런 기록들을 종합해 볼 때 주의 종이라고 한다면 귀신에 대해서 알고 가르쳐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사탄의 세력들이 어떻게 공격을 하고 그들에게 공격당했을 때 어떤 현상들이 나타나는가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고, 그들이 공격하는 최종 목표가 무엇이고 그들이 어떠한 전략전술을 사용하는지에 대해서 전혀 말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는 사람들이 과연 영적 리더들인가? 이들이 이끄는 교회가 주님께서 말씀하신 음부의 권세를 이길 수 있겠는가?(막 16:18, 각주참조)

 

교회에서 귀신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고 말하지 않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적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는다면 이들은 누구의 편인가? 교회에서 귀신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으면 우리는 어디서 귀신을 쫓아내는 방법을 배울 수 있겠는가? 지금의 교회 가운데 영적 전쟁에 대해서, 우리의 생각 속에 올라오는 걱정, 근심, 염려, 불안, 초조가 사탄의 공격이라는 것을 알고 말하는 교회가 얼마나 되는가? 사탄의 견고한 진들이 우리 생각 속의 진들이라는 것을 아는 자들이 얼마나 되는가? 교회의 제도라는 방패를 이용해서 교회가 사탄의 세력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을 가진 자들이 과연 얼마나 있는가? 이런 영적 분별력이 없이 어떻게 영적인 리더가 될 수 있는가?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의 리더들은, 즉 초대교회의 리더들은 열두 사도들로부터 추천을 받아서 파송되었는데,(행 15:25~26, 外 각주참조) 그때 제자들이 써준 추천서는 “이 사람들의 신앙은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라는 증표였다. 제자들이 그곳을 가지 않아도 성도들이 그 사람들의 말에 따르도록 하는, 그 사람들의 가르침이 잘못된 가르침이 아니라는 일종의 확인서였다는 것이다. 바울이 “우리가 다시 우리 자신들을 추천하기 시작하는 것이냐? 아니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처럼 너희에게 줄 추천서와 너희로부터 받을 추천서가 필요하겠느냐?”(고후 3:1, 각주참조)고 말한 대목을 보면, 그 추천서에 의한 사역은 승인된 사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초대교회 시대에 추천을 받아 파송된 자들의 영적 상태이다. 바울이 처음 파송되었을 때에도 그 추천서를 받았을 터인데,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열두 사도 이후의 사도들, 즉 바울이나 실라, 디모데와 같은 사도들의 행적을 성경의 기록에서 살펴보면 그들은 모두 성령의 언어를 이해하였고, 즉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이었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표증으로 바울이 말한 사도의 표적이 드러났다.(고후 12:12, 각주참조) 바울의 사역 현장에서 귀신이 떠나가고 병든 자들이 나음을 입었다. 심지어 그들이 사용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대기만 해도 귀신들이 떠나갔다.(행 19:12, 각주참조) 그때 추천을 받아서 사역 현장으로 투입된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들을 행하는 사람들이었다. 다시 말해서 방언, 통변, 예언, 신유, 축사, 지혜, 지식, 믿음, 영분별의 은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전도는 사람의 지혜나 말로써 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했으며,(고전 2:1, 外 각주참조) 그들이 가는 곳에 하나님께서 동행하셨던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였듯이, 그와 같은 하나님과 동행함이 그들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추천서를 지금 시대로 말한다면 목사 안수일 것이다. 목사 안수를 받은 사람은 신앙적으로 신뢰할만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정한 교육과 목회자를 양산하는 시스템에 의해서 목사 안수를 받은 자들의 영적 상태를 위에 살펴본 내용에 비추어 보면, 이들에게 영적 리더라는 명칭을 사용해서는 안 되는 수준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학위를 준다는 것도 웃기는 이야기이지만, 그 엉터리 학위를 가지고 영적인 지도자같이 행세하는 것이 더 웃기는 일이라는 것이다. 농부에게 별 네 개를 달아주는 것도 웃기는 이야기이지만 그 별을 달고 장군 행세를 하는 자는 더 웃기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성령님에 대해서 전혀 알지도 못하는 자들이 성령님에 대해서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을 하여야 하는가? 영적인 분별력이 없는 목회자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들에게 영적 분별력이 없는 이유는 영으로부터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에서 논했던 주제 ‘누구로부터 배웠는가?’에서 언급하였듯이 영적일 일을 영으로부터 배우지 못하고 사람으로부터 배웠다는 것부터가 첫 단추가 잘못 들어간 것이다. 첫 단추를 잘못 채워놓고 옷매무새가 나오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이다. 이 문제를 심각하게 보아야 하는 이유는 이 일이 영적인 일을 다룬다는 것에 있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들의 영생과 영멸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심각하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목숨을 다룬다는 점에서 심각하다는 것이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생을 다룬다는 점에서 심각하다는 것이다. 의학 지식이 전혀 없는 일반인에게 배를 가르는 복잡한 수술을 맡긴다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이와 마찬가지로 영생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영생을 맡기는 것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영생을 다루는 사람들이 영생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고 영생에 이르는 구체적인 방법을 모르면서 ‘이렇게 하면 될 것’이라는 가정을 가지고 영혼들은 인도하고 있다면, 이것같이 위험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만약, 그들이 제시한 방법이 잘못되어 영생에 이르지 못했을 때, 그때 가서 ‘나는 그런 줄 몰랐다.’고 하거나 ‘나는 그렇게 하면 천국에 갈 줄 알았지’라고 한다면 이와 같이 무책임한 말이 어디에 있는가? 올 수도 없고 갈 수도 없는 곳에서 ‘그럴 줄 몰랐다.’고 한다면 이것은 상상하기도 싫은 내용이다. 이런 꼴을 당하지 않으려면, 영혼이 울부짖으며 유황불에서 타는 고통을 면하려면 지금 나의 신앙이 성경의 기록과 일치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영혼 구원의 문제는 다른 사람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 영생에 관한 문제는 나 자신이 확실하게 점검해야 할 문제이고 구원에 대한 확신과 구원에 대한 확인을 분명하게 해야 할 것이다.(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회복 시리즈 ⌜회복의 개요⌟ 03-5. 구원의 실체를 참조하라.)

 

3. 나를 본받으라

 

“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 11:1)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빌 3:17)

 

바울이 서신서를 쓴 이유는 하나님의 진리를 구체적으로 밝히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진리가 생활 속에서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를 밝히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바울이 자신을 본받으라고 한 이유는 자신과 같이 생활을 한다면 자신의 생활 속에서 일하신 하나님을 너희도 똑같이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지금 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이 항상 현재형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면 지금 시대에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바울을 본받아야 하는 것이다.

 

바울이 “나를 본받으라.”고 말한 이유는 성령으로 시작한 일을 육체로 마무리하는 것들을 막기 위해서였다.(갈 3:3, 각주참조)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면 믿음으로 시작해서 육신의 행위로 온전하게 되려는 시도는 신앙생활 전반에 걸쳐서 나타나게 되는데, 이런 현상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바울은 인간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열심을 내는 한, 인간의 의지와 인간의 계획으로 교회생활을 영위하고 이끌어 가는 한 그것은 죄를 섬기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의미를 알지 못했다. 주님과 영적인 연합을 이루어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다.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다. 인간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면 필연적으로 자기 의가 나온다.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피해갈 수가 없다. 이들을 향해서 바울은 “나를 본받으라.”고 한 것이다.(각주참조) 믿는 자들의 육체는 하나님의 전이 될 수도 있고 사탄의 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성경의 내용이다.(고전 6:19, 각주참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하지 않을 경우 그 육체는 곧 사탄의 전이 된다는 것을 망각한다면 성령으로 시작하고 육체로 마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리더들이 “나를 본받으라.”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이유는 하나님과의 동행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바울과 같이 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과 같이 예수님의 계시로 배우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바울과 같이 영의 실재를 만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에 바울과 같이 “나를 본받으라.”고 말하는 영적 지도자가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바울과 같이 배우고 바울과 같이 살았다면 그 방법을 말하고 그 생활을 행동으로 보여주어 신앙의 본이 되었을 것이다. 영적 지도자라고 한다면 양심의 부끄러움이 없이 “나를 본받으라.”고 바울과 같이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영적인 리더라고 말하려면, 영의 실재와 동행하면서 경험한 내용을 다른 지체들에게도 경험시킬 수 있어야 한다. 나는 경험하였는데 나를 따라서 똑같이 행하는 사람들이 내가 경험한 일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거짓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다. 성경의 기록을 보면 모세가 경험한 하나님을 여호수아도 경험했고, 엘리야가 경험한 하나님을 엘리사도 경험하였다. 더 말할 것 없이 다윗이 경험한 하나님을 솔로몬도 경험하였다. 영적인 일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전한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전하게 되기를 심히 떨었노라.”(고전 2:1~5, 각주참조)라고 고백한 내용이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목회의 길을 가면서 나름대로 영적인 지도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금 성령이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영생을 다루는 사람들이 자신이 확신하지 못하고 확인하지 못한 구원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일하는 생활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하신 흔적이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고, 모든 사람들이 그 일하심을 확인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인간의 혼적인 능력으로 행하는 일과 영적인 일을 구별하지 못하고서 혼적인 일을 영적인 일이라고 말할 경우에 분별의 어려움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적인 생각에서 시작하여 세상적인 시스템의 힘으로 이룬 성장을 하나님의 도움으로 성공하였다고 말하면 대부분 분별력이 없는 사람들은 그렇다고 수긍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인 일이 아니라 혼적인 일이다. 영적인 일은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하나님께서 마무리하신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구별하는 데에 어려움이 따르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혼적인 일을 영적인 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영의 능력에 미치지 못하는 혼의 능력의 한계 때문에 나중에는 구별이 된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혼적인 능력으로 행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실패가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식될 때에는 많은 대가를 치른 후라는 것도 경험을 통해서 터득하게 될 것이다.

 

영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스스로 먼저 경험하고, 자신이 경험한 내용만을 말하여야 한다. 양들의 습성 가운데 아주 특이한 습성이 하나 있다고 한다. 양은 앞에 있는 양이 어떤 위험에 처해있는지의 여부를 판단하지 않고 그저 앞에 있는 양을 따라간다는 것이다. 앞의 양이 물에 뛰어들면 뒤따라서 모두 물에 뛰어든다는 것이다. 양들은 목자의 인도에 맹신하는 습성이 있다는 것을 영적인 리더라고 하는 자들은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그것을 이용해서 자신의 사욕을 채우는 늑대의 역할을 하고 싶지 않다면 하나님을 만나야 할 것이다. 진정한 목자라면 양들의 영생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면 안 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바울처럼 조정기간을 통해서 예수님의 계시로 배워야 할 것이고,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만 말해야 한다. 그럴 때 ‘나를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회복시리즈 04. 그리스도의 영 中 일부 발췌 / 박찬빈 著]